광복후 인구 2.5배 늘고 '나홀로族'에 황혼이혼 …결혼은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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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수하는 유엔군 수송선에 오르기 위해 몰려든 피란민들의 모습(1950.12.19). (눈빛출판사 제공) |
<광복70년> 국제시장서 SNS까지…숨 가쁘게 달려온 삶
멀건 보리죽 먹던 대한민국, 선진국 반열서 스마트폰 범람
광복후 인구 2.5배 늘고 '나홀로族'에 황혼이혼 …결혼은 '선택'
(서울=연합뉴스) 이상헌 기자 =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를 가고 길을 잃고 헤메였던가…'
1950년 12월 메러디스 빅토리아호의 1만4천여 피란민 틈바구니에서 동생 막순이를 잃고 목놓아 울었던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 덕수. 부산 국제시장 친척집 단칸방에서 겨우 입에 풀칠하던 가녀린 소년은 홀어머니와 두 동생의 가장으로서 숨 가쁘게 한평생을 살았다.
나라를 되찾은 감격의 함성이 채 가시기도 전에 동족끼리 총부리를 겨누고 결국 두 동강 난 대한민국. 그 국민은 밥알도 없는 멀건 쌀죽과 보리죽, 초근목피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하지만, 반세기가 조금 넘는 세월 동안 괄목상대할 변화가 생겼다.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한강의 기적'을 이뤄낸 국민은 먹고사는 문제를 넘어 대한민국을 선진국 반열에 올려놨다.
그 짧은 기간에 압축성장하면서 격동의 변화를 겪은 우리 국민은 울고 웃고 분노하고 그리고 아픔을 참아야 했다.
◇ 두 배 반 늘어난 인구…"한둘만 낳자"에서 "되도록 많이"
건국 이듬해인 1949년 남한 인구는 2천18만명이었다. 1967년 3천만명, 1984년 4천만명을 돌파하더니 2012년 6월에는 '5천만둥이'가 태어났다.
올해 인구가 5천61만명이니 광복 직후보다 2.5배가량 늘었다.
서울은 1949년 144만명으로 전체의 7.1%에 그쳤지만, '자식을 낳으면 서울로 보내라'는 옛말처럼 지금은 전체 인구의 20%인 1천10만명이 서울에 둥지를 틀고 있다.
1950년대엔 제대로 된 국가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아 가족계획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다.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1970년대에 '둘만 낳아 잘 기르자', 1980년대는 '아들 딸 구별 말고 하나만 낳자'는 운동이 벌어졌다. 불임시술을 받은 가정에 생계비를 주고 자녀 진료비를 깎아주기도 했다.
가임 여성의 총 출산율인 합계출산율도 1960년 6명에서 1980년 2.83명, 1990년 1.59명으로 뚝 떨어졌다. 2005년엔 1.08로 아이를 가장 안 낳는 나라 중 하나가 됐다. '제발 좀 낳아달라'는 정부의 호소에 작년엔 1.21로 소폭 상승했다.
3대가 함께 살던 전통도 점점 옅어져 1인 가구가 놀랄 만큼 늘어났다. 2010년 기준으로 1인 가구는 414만이다. 전체 가구가 1천757만이니까 넷 중 한 가구가 '나홀로족(族)'이다. 1985년엔 66만으로 전체 가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6.9%였다.
사회도 고령화하고 있다. 이미 2000년에 고령화사회(65세 이상 인구 7% 이상)에 진입했고 고령사회(65세 이상 인구 14% 이상)에 다가가고 있다. 1955년 3.3%였던 65세 이상 고령인구 비중은 작년 12.7%까지 올라갔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걸 상상할 수 없었다. 지금은 미혼 남녀의 과반이 "결혼은 선택"이라고 당당히 말하는 시대다.
인구 1천명당 혼인 수인 조혼인율은 1970년대 초반 7.6에서 1990년 9.5로 높아졌다가 2001년 6.7, 작년 6을 기록했다. 결혼관이 바뀐 것이다.
이 때문에 초혼 연령도 덩달아 높아졌다. 1972년 남성 26.7세·여성 22.6세에서 1989년 남성 27.8세·여성 24.8세로, 2001년 남성 29.6세·여성 26.8세, 작년 남성 32.4세·여성 29.8세로 지속적으로 올라갔다. 정부는 2035년엔 65세가 넘어서도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인구가 10만명을 넘길 것으로 보고 있다.
조이혼율은 1970년대 초반 0.41에서 1990년 1.13, 작년 2.3을 기록하는 등 상승 곡선을 그린다.
결혼 30년 이상 된 부부의 '황혼이혼'도 작년에만 1만300건에 달했다. 1999년 70대 할머니가 지나친 순종을 요구하고 상의 없이 재산을 대학에 기증하는 행태를 보인 남편에게 이혼소송을 내 파문을 일으켰다. 그때 생긴 말이 황혼이혼이다.
◇ 굴곡의 노동계…전태일에서 미생까지 '끝없는 투쟁의 역사'
사실 노동운동은 1945년 광복과 더불어 태동했다. 그해 12월 16개 산별노조와 1천194개의 분회가 소속된 좌익계열 노동단체인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가 결성됐다. 이때 이미 전평은 최저임금제와 8시간 노동제 등을 강령으로 내세웠다.
미군정은 전평을 불법화하고 이듬해 한국노총의 전신인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대한노총)을 출범시켰다. 자유당 정권의 전위대로 활동하던 대한노총은 5·16쿠데타로 해체됐다가 1961년 한국노총으로 재탄생했다.
이때부터 노사대립이 격화하는 등 노동운동이 본격화한다. 1970년대 전태일 분신·동일방직사건·YH무역농성사건 등을 거치면서 노동운동이 사회 곳곳으로 스며들었다. 1987년 6월 항쟁과 더불어 노동자 대파업을 계기로 노동역사는 새장을 열었다.
지금도 불법 노동행위가 횡행하지만 사실 근로기준법과 노동조합법, 노동쟁의조정법, 노동위원회법 등 노동4법이 만들어진 건 1953년이다. 5·16쿠데타로 효력이 일시 정지되는 등 부침도 있었지만 지속적인 개악과 개선이 반복됐다.
1987년 남녀고용평등법이 제정됐고, 이듬해 최저임금법이 시행됐다. 2003년엔 근로기준법이 개정돼 법정근로시간이 지금처럼 주 40시간으로 줄었다.
2006년엔 비정규직 보호법이 국회를 통과했지만 비정규직 양산법이란 비아냥거림을 들어야 했다. 작년 말 한 케이블방송사에서 방영한 '미생'에 열광했던 것도 청년실업에 허덕이는 이런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다.
◇ 60년대부터 입시 열풍…수없는 정책변화에도 사교육 열기 '여전'
한국전쟁 당시 흙먼지 날리던 천막 교실은 컴퓨터가 갖춰진 첨단 교실로 탈바꿈했다. 1948년 3천900여개였던 초·중·고교 수는 지금은 2만개에 육박한다. 이런 성장은 '우리 애들은 나처럼 살게 하지 않겠다'는 교육열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우리나라는 이미 1960년대부터 입시 광풍에 휩싸였다. 이른바 명문 고교-S대 간판을 달려면 중학교부터 명문이어야 했다. 사교육이 넘쳐났다. 어려웠던 시절, '개천에서 용 나려면' 교육을 통한 신분상승밖에 없었으니 당연한 현상이었다.
입시 열기가 심상찮자 정부는 1968년 중학교 무시험 입학제, 1973년 고교 평준화 처방을 내놨다. 1980년대에는 대학 본고사 폐지와 과외 금지령이 내려졌다.
이후 본고사에서 학력고사로 그리고 수능과 수시입학으로 셀 수조차 없는 입시정책이 쏟아졌지만 대한민국의 사교육 열기는 단 한때도 사그라진 적이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아이들은 밤늦게까지 학원에서 머리를 싸매고 있다.
또 대부분이 농·임·수산업에 종사하던 광복 직후에는 직업이라는 개념이 생소했다. 다들 비슷했기 때문이다. 미군정시절 미군부대에서 일하는 타이피스트가 인기였다. 고물상도 넘쳐났다. 지금도 그렇지만 교사는 시대를 따지지 않는 인기직종이다.
경제개발이 본격화하던 1960년대엔 기능공이 주목받았다. 여공은 서민층 여성의 대표적인 직업이었다. 경제구조가 중화학공업 중심이었던 1970년대부턴 대기업 직원이 1등 배우자감이었고, 종합상사맨과 항공승무원이 뜨기 시작했다.
1990년대 IT가 발달하면서 벤처기업가가 크게 늘었다. 외환위기와 그에 따른 저성장 기조, 취업난 심화, 고용 불안정이 이어지면서 모험보다는 안정을 택하는 분위기가 지배한다. 사회적 지위와 연봉과는 무관하게 정년이 보장된 공무원이 단연 으뜸인 세상이 되는 게 현실이다.
◇ 전화가 재산목록 1호였는데…스마트폰에 푹 빠진 대한민국
요즘은 휴대전화 두 대를 들고 다니는 사람도 쉽게 볼 수 있지만 전화기 한 대가 아파트 한 채 값과 맞먹는 시절이 있었다. 1980년대 전자식 교환기 도입으로 아무 때나 전화를 가입하기 전까지 전화는 단연 재산목록 1호였다.
1955년 전화가입자는 3만9천명이었다. 1960년대 전화 매매를 허용하자 가격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이에 정부가 매매를 금지하자 자유롭게 사고팔 수 있었던 이른 바 백색전화 한 대 값은 260만원까지 치솟았다. 당시 서울 50평짜리 집값이었다.
1966년 처음 선보인 공중전화는 서민의 애용품이었다. 공중전화 부스마다 긴 줄을 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1982년 무선호출기 '삐삐'라는 게 세상에 나왔다. 1997년 1천500만명 넘게 갖고 있던 삐삐 덕에 공중전화는 더욱 인기를 끌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 맞춰 휴대전화 서비스가 개시됐지만 전국 서비스는 1993년에야 이뤄졌다. 그나마 당시에는 들고 다니기에 너무 커서 '무전기'로도 불렸다.
휴대전화 가입자는 1990년 8만명에 불과했지만 작년엔 5천720만명을 넘어서는 등 '인당 휴대전화 두 대' 시대가 도래했다.
2000년대 중반 말 그대로 컴퓨터를 옮겨놓은 스마트폰이 나오면서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시대가 열렸다. 카카오톡, 페이스북, 밴드 등이 그것이다. 지금은 SNS 없이는 생활 자체가 되지 않는다. SNS로 거리에 상관없이 초 단위로 정보를 교환하고 사람을 찾고 범죄자를 검거하기도 한다.
우리 사회를 휩쓸었던 2008년 광우병 파동, 작년의 세월호 참사, 지금의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혼란을 겪는 이 순간에도 바로 이 SNS가 대중을 규합하고 여론을 형성하는 매개체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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