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 하나로 미국서 우뚝 선 박병철 에베레스트 사장

편집부 / 2015-04-28 09:44:35
美·중남미 대형체인점, 백화점, 온라인서 월 100만 개 팔려
"34년 동안 신용과 성실로 무장"…"고생해서 벌어야 내 돈"

가방 하나로 미국서 우뚝 선 박병철 에베레스트 사장

美·중남미 대형체인점, 백화점, 온라인서 월 100만 개 팔려

"34년 동안 신용과 성실로 무장"…"고생해서 벌어야 내 돈"



(서울=연합뉴스) 왕길환 기자 = 8천848m의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산. 재미동포 박병철(67) 에베레스트 트레이딩 사장은 이 산처럼 가방 하나로 세계 최고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34년을 달려왔다.

사업 여정을 등산으로 친다면 그는 지금 얼마만큼 올랐을까?

박 사장은 지난주 경북 구미에서 세계한인무역협회(월드옥타)와 연합뉴스 주최로 열린 제17차 세계대표자대회 및 수출상담회 참가차 방한했다. 월드옥타 이사장인 그는 28일 연합뉴스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미국 시장에서 가방 브랜드로 '에베레스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면 고지에 거의 오른 것 아닌가요"라고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 회사가 만든 가방은 월마트 등 대형 유통체인점과 백화점, 미국 전역에 1천 개가 넘는 소매점에 진열돼 있어요. 멕시코의 백화점과 체인점에도 나가고, 최근에는 아마존 등 온라인에서도 인기가 높습니다. 대략 월 100만 개 이상의 가방이 팔리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연간 매출액 공개를 꺼리는 박 사장은 "그냥 가방 장사로 미국에서 성공했고, 세계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고만 써 달라"고 두루뭉술하게 넘어갔다. 그러면서 "수치로 성공을 말하는 것보다는 어떻게 가방을 잘 팔았는지가 중요한 거 아니냐"고 반문하면서 2시간 정도 가방 외길 34년을 풀어놓았다.

그는 경남 양산에서 태어나 6개월 때부터 부산에서 자랐다. 경남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7년 한국외대 무역학과에 입학했다. 3년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박 사장은 4학년 2학기 때 남들보다 먼저 일본 미쓰이(三井)물산 서울지사에 입사했다.

"한국의 대일(對日) 무역의존도가 60% 이상일 때 미쓰이와 미쓰비시(三菱)가 한국 수출의 40%를 차지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대단한 회사였겠어요. 한국의 청와대 경제수석도 미쓰이 지사장한테는 큰소리를 못 칠 정도였으니까요. 그래서 제 프라이드도 강했죠."

눈에 뵈는 게 없을 정도로 잘나가던 그는 재직하면서 주식과 부동산 투자에 손을 댔다. 1970년대 초반인 당시는 건설회사들이 중동에 진출해 붐을 일으키던 때. 그가 사들인 주식은 자고 나면 상한가를 쳤다. "도대체 왜 이렇게 하루가 안 갈까"라고 기다릴 정도였다.

아예 회사를 그만두고 재무부, 증권감독원, 청와대, 중앙정보부, 경제일간지, 방송사 등에 다니는 관계자들을 끌어들여 원금 보장을 해주겠다며 자금을 모아 주식투자를 대행하는 일에 나섰다. 100억 원이 넘는 돈을 벌 정도로 '대박' 행진은 이어졌다.

"세상이 너무 만만해 보였어요. 서울 명동의 한 허름한 식당에서 빈대떡을 부치는 노파를 보면서 한심하다는 생각도 했죠. 그 노파는 인근에 빌딩 두 채를 소유한 알부자라는 소문이 났습니다. '그 돈으로 주식 투자를 하면 편히 살 텐데 왜 저렇게 사서 고생을 할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였어요. 그런데 그 할머니가 왜 그렇게 살았는지 미국에 이민하고 나서 알았습니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총에 맞아 숨진 10·26 사건과 신군부가 실권을 장악한 12·12 사태가 터지면서 박 사장은 날개도 없이 추락했다. 모든 주식이 휴지로 변하고, 모았던 재산과 집을 하루아침에 날려버렸다.

제주도에 있는 친구(현 금호전기 박영구 회장) 집에 칩거하며 1년 정도 세상을 등졌다. 1977년 결혼해 아이 낳고 알콩달콩하던 신혼 생활도 다 깨졌다.

도무지 앞날에 대한 희망이 없을 때 한 지인이 그에게 미국 이민을 권했다.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기에 미국행을 선택하기는 수월했다. 1981년 그는 한 무역회사의 주재원 비자를 받아 가족과 함께 태평양을 건넜다.

"물 건너 제주도까지 쫓겨와 살았는데, 한 번 더 물 건너면 된다는 심정으로 일본, 하와이를 거쳐 미국 LA에 도착했어요. 일본에서 사업하던 삼촌이 1천만 원을 주머니에 넣어줬어요. 700만 원을 들여 가방과 옷가지들을 샀어요. 당장 할 것도 없으니 팔아서 생활비라도 대겠다는 생각에서죠. 비행기표를 사고 남은 돈 70만 원으로 이민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고생 모르고 이른 나이에 큰돈을 만졌던 그에게 이민 생활은 혹독했다. 처음에는 한인이 경영하는 햄버거 가게에서 일했다. 한 달 내내 일해야 600달러를 받았다. 그 돈으로는 가족을 부양하기가 어려워 일이 끝나면 가져온 가방과 옷가지들을 들고 거리로 나갔다.

체면도 자존심도 다 버리고 뛰었지만 생활은 쪼들렸다. 뭔가 대책 마련이 필요했다. 두 달 만에 햄버거 가게를 그만두고 가방 판매에 나섰다. 한 무역회사에서 가방 재고를 팔아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가게가 없었기에 중고품 시장(스왑밋), 주유소 공터 등지를 떠돌며 물건을 팔았다.

"가방을 쌓아놓고 공중에 던지면서 '룩 앳 미'(Look at me), '세이브 머니'(Save Money)라고 손뼉을 치면서 소리쳤어요. 주위의 시선을 끌면서 박리다매로 판매했죠. 하루는 비가 쏟아졌어요. 난감했죠. 가방을 못 팔면 끝장날 판이었어요. 그때 가방에 방수 표시가 돼 있는 걸 봤어요. 순간 지혜가 떠올랐죠. '방수 가방 5달러'라는 안내판을 만들어 세우고는 장사를 했죠. 비가 오는데도 불티나게 팔렸어요."

새너제이, 샌프란시스코 등지까지 장거리 판매도 강행했다. 새벽 4시 전에는 장터에 도착해 신고해야 하기에 LA에서 물건을 팔고 졸린 눈을 비비며 고속도로를 달렸다.

그렇게 목숨을 건 노상 판매에 매달린 끝에 결실을 보기 시작했다. 장사꾼들 사이에 가방을 잘 판다는 소문이 돌면서 물건을 대 달라는 요청이 잇따랐다. 그래서 공급자가 된 것이다. '가장 높은 회사를 만들겠다'는 목표로 '에베레스트 트레이딩사'라는 이름의 회사를 차린 것도 그 즈음이다.

1983년부터 주문자 생산방식(OEM)으로 한국에서 가방을 제조해 수입, '에베레스트'라는 브랜드를 달아 미국 시장에 팔았다. 또 스리랑카와 중국에 생산공장을 차렸다. 한때 1천500명이 넘는 직원이 일하기도 했다.

또 1989년에는 국내의 시장에서 볼 수 있었던 전대(纏帶)를 '페니백'(허리벨트 가방)으로 개발해 히트를 쳤다. 중남미에서는 잔스포츠, 이스트팩보다 인기를 끌어 에베레스트 상표를 단 가짜 상품이 시중에 유통될 정도로 성공 가도를 달렸다.

"과거 명동의 식당 할머니가 '고생해서 벌어야 내 돈이야'라고 말하며 저를 꾸짖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습니다. 제가 고생을 해보고 나서야 깨달았죠. 저는 '신용', '성실'이란 좌우명으로 장사하면서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여건상 한 업체보다 다른 업체에 물건을 비싸게 팔면 반드시 가방을 더 주든가 돈을 환급해줬다. 당장은 손해를 보더라도 신용은 쌓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민자로서 미국 땅을 밟고, 사업을 하면서 줄곧 사후 관리를 철저히 하고 있다. 망가진 가방을 들고 와도 다 교환해 줄 정도다. 이 또한 신뢰를 보여주는 경영 방침이었다.

월드옥타 LA지회 이사장, 회장을 지낸 그는 차세대 무역인들에게 "비즈니스의 생명은 신용"이라고 강조한다. 자신이 직접 체득한 성공 노하우이기 때문이다.

그는 에베레스트를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 세계의 가방회사로 만드는 데 힘쓴 직원들에게 항상 고마움을 표한다. 그래서 월급, 성과급 등 직원에 대한 대우를 파격적으로 하고 있다.

LA한인경제인협회 회장, 남가주한국학원 이사장, 가정상담소 이사, 극동문제연구소 이사, 미주한인재단 이사를 맡아 한인사회에 봉사하면서 사회 환원의 폭도 넓혀 왔다.

"지금까지 번 돈을 적당한 시기에 한인사회를 위해 통 크게 기부할 생각입니다. 고국 발전을 위해서도 힘닿는 데까지 노력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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