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서 오페라 '탄호이저' 싸고 창작 자유 논란
'신성모독' 기독교계 반발에 극장장 해임…문화계는 "창작자유 수호"
(모스크바=연합뉴스) 유철종 특파원 = 러시아에서 때아닌 창작의 자유 논란이 거세게 일고 있다.
시베리아 지방도시 노보시비르스크의 국립극장이 독일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를 현대적으로 해석해 무대에 올린 종교적 내용의 오페라가 신성 모독적이라며 기독교인들이 반발하고 나서면서 극장장이 해임되는 사태로까지 번진 것이다.
러시아 문화부는 29일(현지시간) '노보시비르스크 오페라·발레 극장' 극장장 보리스 메즈드리치를 해임했다. 문화부는 기독교인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킨 오페라 '탄호이저' 연출과 관련 문제가 된 일부 내용을 바꾸고 극장 지도부가 사과하라는 시정 명령을 내렸지만 이행되지 않았다고 해임 이유를 설명했다.
문화부는 "고전을 새롭게 해석하는 것은 자유지만 정부 예산 지원을 받는 극장이 사회 분열을 초래하고 상당수 국민을 모욕하는 연출을 한 것은 허용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에 앞서 이날 노보시비르스크 시내 광장에선 기독교 신자들이 중심이 된 약 3천 명의 시위대가 문제의 오페라 '탄호이저' 공연을 반대하는 집회를 열었다.
시위 참가자들은 '신성을 보호하자. 러시아를 구하자' 등의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나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게 기독교인들의 믿음을 모욕하는 도발을 금지해 줄 것과 오페라 공연을 허용한 노보시비르스크 주정부 인사들을 해임할 것을 요구했다.
시위가 벌어지고 몇시간 뒤 문화부는 메즈드리치 극장장 해임 조치를 취했다.
문제의 오페라 '탄호이저'는 노보시비르스크 극장의 젊은 연출가 티모페이 쿨랴빈이 지난해 말부터 무대에 올린 작품이다.
쿨랴빈은 바그너 작품의 방탕한 음유시인 탄호이저 대신 세속적이고 쾌락적 삶에 빠진 예수의 젊은 시절에 대한 영화를 찍는 감독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오페라에는 노출된 여성의 두 다리 사이에 십자가에 걸린 남성(예수)의 모습이 그려진 자극적 영화 포스터도 등장한다.
노보시비르스크의 러시아 정교회 지부는 공연이 시작된 뒤 오페라 내용이 신성을 모독하고 기독교인들의 믿음을 모욕하는 것이라며 공연을 중단시켜 달라고 문화부 등에 요청해왔다. 정교회 신자들은 여러 차례 공연 반대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노보시비르스크 검찰은 지난 2월 정교회 측의 요청을 받아들여 극장장 메즈드리치와 연출자 쿨랴빈을 종교 모독 혐의로 기소하기도 했다. 지역 법원은 그러나 이달 중순 공연 내용에 심각한 종교 모독적 요소가 없다며 무죄 판결을 내렸다.
노보시비르스크 주정부 측도 오페라에 비도덕적 요소가 있긴 하지만 문화 공연의 적법성을 가리는 데 사법기관이 간여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주장하며 공연 중단 조치 등을 취하지 않았다.
러시아 공연 예술의 상징인 볼쇼이 극장 대표 블라디미르 우린 등을 비롯한 문화계 인사들도 탄호이저 연출자를 지지하고 나섰다.
논란에 휩싸인 극장 측은 공연을 계속하되 기독교인들을 크게 자극한 오페라 속 영화 포스터의 예수 모습을 흰색 천으로 가리는 등 일부 내용을 수정하는 타협안을 제시했으나 통하지 않았다.
노보시비르스크의 정교회와 기독교 신자들은 공연 중단을 요구하며 또다시 대규모 시위를 벌였고 이에 문화부가 극장장 해임 조치로 수습에 나섰다.
정교회 측이 이같은 수습책을 받아들일지는 아직 미지수다. 반면 문화계에서도 다음 달 5일 창작의 자유 수호를 촉구하는 자체 집회를 열 계획이어서 양측의 대립이 확산할 조짐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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