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제균 "전라도의 남진 지역적 의미 있어…캐스팅에 공들였죠"
<'국제시장' 속 남진, 윤제균 감독을 만나다>
남진 "그 시대 얘기한 실화…베트남 전우·서영춘 선배 그리워"
윤제균 "전라도의 남진 지역적 의미 있어…캐스팅에 공들였죠"
(서울=연합뉴스) 이은정 기자 = 1960~70년대 전설인 가수 남진(70)과 영화 '국제시장'으로 1천만 관객을 돌파한 윤제균(46) 감독이 만났다.
두 '거물'의 만남은 남진이 자신을 '의미있는 캐릭터'로 스크린에 옮겨준 윤 감독에게 '식사 한번 하자'고 제안하며 이뤄졌다.
윤 감독은 '국제시장'에서 굵직한 근현대사와 정주영, 앙드레김, 이만기 등 시대의 아이콘을 등장시켜 세대간, 지역간 소통을 꾀했다.
그중 전남 목포 출신인 남진을 지역 간 갈등을 해소하는 상징적인 인물로 담아냈기에 이날의 '황금조합'은 한층 의미있었다.
영화 속에서 동방신기의 유노윤호가 연기한 남진은 베트남전에 참전해 기술근로자로 그곳에 간 주인공 덕수(황정민 분)의 생명을 구한다.
노년이 된 덕수는 아내 영자(김윤진)와 제수를 준비하러 시장을 찾았다가 노래가 흐르자 이렇게 말한다.
"노래는 역시 남진이지~."
영자가 "남자답고 노래 잘하긴 나훈아"라고 말하자 버럭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영화가 그 시대를 살아낸 중장년층의 공감을 얻으며 1천300만 관객에 육박하자 남진은 주위에서 "남진 씨 나오는 그 영화 봤느냐"란 인사를 수없이 들었다.
하루 전날 영화를 관람한 남진은 "영화를 몇 년 만에 봤는지 모르겠다"며 "해병대 전우 몇몇도 '야~ 우리 모습 나오더라'며 영화를 보고 연락이 왔다. 옛날 생각이 정말 많이 나 소속사 대표와 둘이 앉아 울었다"고 고마움을 표시했다.
윤 감독은 "올해로 76세인 어머니가 남진 선생님 리사이틀을 다니셨다. 어머니가 오늘 선생님 만난다는 말에 난리가 났다"고 했다.
"유노윤호도 이 자리에 참석하려 했는데 일본 공연이 있어 아쉽게도 못 왔다"는 말도 덧붙였다.
지난 5일 강남구 압구정동의 한 음식점에서 나눈 두 사람의 정겨운 대화 내용을 전한다.
▲ 남진(이하 남): 영화가 끝날 때까지 옛날 생각이 나서 머리가 '띵'했어요. 베트남전 때 작전하다가 죽은 전우가 그립고, 그때 친구·선배들이 파독 광부로 가고 친구 누나들이 간호사로 간 생각도 났어요. 감동이 있으니 사랑받은 겁니다. 관객의 마음을 건드려준거죠. 대충 건드린 게 아니라 심부(深部)를 건드렸어요. 앙드레김, 정주영 등 시대 속 인물을 등장시킨 것도 감독의 아이디어일텐데 결국 그게 감독의 맥박이죠.
▲ 윤제균(이하 윤): 선생님 등장 부분은 중요했어요. 촬영 들어가기 전 젊은이들에게 물으니 선생님은 아는데 실제 베트남전에 참전한 사실을 모르더라고요. 조사해보니 실제 전투에 20번 이상 참여하셨더라고요. 그때 철모를 쓰고 있는 사진이 감동이었습니다.
▲ 남: (젊은이들은) 가수여서 공연하고 온 줄 알겠죠. 하하. 가수로 활동하던 1968년 해병 전투병으로 입대해 1969년 베트남에 파병됐는데 지금 휴양지로 유명하다는 다낭에 도착해 호이안으로 들어갔어요. 전 최전방 부대로 배치됐죠. 제가 간 곳이 차로 못 가는 위험한 지역이었어요. 부비트랩, 지뢰가 매몰돼 있어 트럭이 아닌 헬리콥터를 타고 갔는데 밑에서 총을 쏘아대는 불빛이 올라올 땐 떨리더군요. 한창 영화도 찍고 갔을 때여서 이게 촬영인지, 실제인지 실감이 안 났어요. 제가 엎드린 10m 옆에 포탄이 떨어졌는데 다행히 불발돼 식겁한 적도 있고, 안전사고도 많았어요.
▲ 남: 그런데 그 친구(유노윤호)가 정말 연기를 잘했어요.
▲ 윤: 유노윤호가 광주 출신입니다. 선생님을 전설처럼 존경하는 가수라고 했어요.
▲ 남: 어쩐지 영화 속에서 수류탄을 던지고 '괜찮소~'란 한마디를 하는데 전라도 사투리 억양이 제대로였어요. 그게 어려운 대사거든. '딱'이라고 느낄 정도로 내가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연기하는 표정 보니 '저래서 뽑았구나', 처음 보는데도 멀게 느껴지지 않았어요.
▲ 윤: 제일 중요한 게 잘 생겨야 했습니다. 하하. 섭외 당시 기준이 있었는데요. 첫째는 선생님이 가수의 전설이시니 현재 유명한 가수를 하고 싶다, 두번째는 선생님이 전라도를 상징하니 전라도 사투리를 100% 소화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세번째는 사람이 좀 착했으면 좋겠다는 거였습니다. 후보가 있었는데 만나보니 이 친구가 사람이 너무 괜찮았어요.
▲ 남: 베트남전 촬영은 어디서 했나요.
▲ 윤: 그 장면 촬영할 때도 에피소드가 많았습니다. 태국에서 찍었는데 정글 신이어서 도심에서 떨어진 한적한 리조트를 빌려 스태프와 배우가 묵고 촬영했습니다. 그런데 평소 손님이 없던 리조트에 유노윤호 팬들로 꽉 찬 겁니다. 제 방 양 옆에도 팬들이 묶었는데 밤새 동방신기 노래를 틀어놓더라고요. 유노윤호가 공항에 들어올 때도 엄청난 팬들이 몰려 마중 나간 PD가 '옴짝달싹 못하고 있다. 벌집을 건드린 것 같다'고 했으니까요. 요즘 아이돌은 상상을 초월하더군요.
▲ 남: 나만 해도 옛날 사람이어서 국내에서만 활동해 실감이 안 나는데 후배들 한류가 대단하다 하더라고요. 그땐 노래하고 춤추는 가수가 나밖에 없다시피 했는데 댄스도 아니고 스텝을 밟는 정도였죠. 그런데 요즘은 한 팀에 10명씩 춤추는 걸 보면 전문 댄서처럼 실력이 대단해요.
▲ 윤: 선생님이 요즘 태어나셨으면, 하하. 인터넷에서 '남진은 지금의 동방신기와 비교도 안 되는 인기였다'는 댓글이 인상적이었어요. 결국 오빠 부대의 원조 하면 남진·나훈아 선생님이시잖아요. 그때부터 오빠 부대가 시작된 거니까요.
▲ 남: 베트남전에 다녀온 뒤 1971년 서울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 공연으로 복귀했어요. 공연할 때면 극장 담이 무너져 두 번이나 물어준 적도 있죠. 극장 옆에 공장이 있으면 그날 작업은 끝이었어요. 하하.
▲ 윤: 남진-나훈아 라이벌 시대에는 제가 너무 어렸습니다. 초등학교 후반부터 조용필 세대였으니까요. 기억나는 건 어머니는 (가수는) 남진, 아버지는 나훈아라고 한 겁니다. 전 부산 출신이지만 화려하고 잘 생기신 남진 선생님이 좋았습니다. 사실 영화에서 경상도 사람의 목숨을 구해주는 사람이 전라도의 전설이길 바랬어요. 만약에 전라도 사람의 목숨을 구해줬다면 경상도 인물로 했을 겁니다. 지역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 남: 그땐 그런(지역갈등) 건 없었지. 내 히트곡이 부산서 나왔어요. 전라도 보다 경상도서 더 많이 공연했고요. 내 마누라도 부산 사람이에요. 친한 사람도 경상도 사람들이죠.
남진과 윤 감독은 이야기를 거듭할수록 영화가 그려낸 장면과 시대를 엮어보며 한층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눴다.
'국제시장'의 시작점인 1950년 흥남철수작전 때 미군이 흥남항에서 피란민을 구하던 때부터 지난 60여 년의 스토리는 1945년 해방둥이인 남진에게 큰 공감을 불러일으킨 듯 보였다.
남진은 "영화가 이 시대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하고 재무장하게 해준 전환점이 됐다"며 "감독 나이를 물어보니 젊어서 놀랐다. 정말 깊게 생각하고 만들었더라"고 칭찬했다.
▲ 윤: 하지만 정치적, 이념적으로 논란도 많았습니다. 그 시대를 미화한 것 아니냐고요.
▲ 남: 그 시대를 얘기한 것뿐인데, 이건 실화니까요. 흥남철수 때 미군 장군이(에드워드 포니 대령)이 피란민을 구해준 것도 사실이고.
▲ 윤: 대학생들과 얘기 나누며 충격을 받았어요. 영화를 감명깊게 잘 봤다고 해 '너희들은 이해를 못할텐데 어떻게 잘 봤냐'고 묻자 '감독님의 상상력이 대단하다'는 겁니다. 이 친구들은 픽션이라 여겨 '실제 있었던 것 마냥 그려져 감탄했다'는 거죠. 문화적인 충격을 받았는데 이 친구들은 실제 얘기라고 하니 충격받았다고 하더라고요. 왜 그런가 보니 국사가 필수가 아니라 선택과목이래요. 국사 공부를 안 해도 대학 가는데 문제가 없는 겁니다.
▲ 남: 정말 잘못됐네요. 우리 시대가 변했지만 아무리 변해도 역사는 영원한 건데.
▲ 윤: 미국의 할리우드 리포터 기자랑 인터뷰하며 '미국은 어떻냐'고 물었더니 미국 역사가 200년밖에 안되지만 필수이고 성적이 안 좋으면 대학에 갈 수 없대요. 국사가 선택이란 건 저도 이해가 안 됩니다. 제 아이도 초등학교 2학년, 4학년인데 우리나라가 못 살았다는 걸 전혀 이해 못 합니다.
▲ 남: 산업화를 이루며 부모 세대는 고생을 많이 했어요. 간호사, 광부들이 한두 사람이었어요? '울려고 내가 왔나'란 노래가 1965년 대박을 내며 남진이란 이름을 갖게 했는데 '낯설은 타향 땅에 내가 왜 왔나'란 가사가 고향 떠나 타향살이하는 사람들을 보듬어준 거죠. (영화 속 남진이 전쟁터에서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라고 흥얼거린) '님과 함께'도 1970년대 새마을운동 때 히트했어요. 내가 잘 불러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백 년 살고 싶어'란 가사가 부모와 고향 떠난 힘든 사람들을 위로하며 타이밍이 맞았던 거죠. 요즘은 세상이 편해졌고 미제보다 국산이 더 잘 만들지만, 요즘 세대들이 동화나 꿈 같은 얘기라며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있다는 걸 돌아보게 해준 것 같아요.
▲ 남: 감독님이 정말 깊이 생각하고 영화를 만든 것 같아요. 심지어 파독 광부들이 대한항공이 아니라 에어프랑스를 타고 가는 것까지도 맞는 말이거든요. 대한항공이 나왔으면 뭐가 안 맞는데, 이런 것도 놓칠 수 있는데….
▲ 윤: 네, 실제 에어프랑스였습니다. 그때는 1963년이어서 대한항공이 없었죠.
▲ 남: 파독 광부들의 광산 장면은 어디서 찍은건가요.
▲ 윤: 실제 독일 함보르 광산에서 찍으려 했는데 폐광이 됐더군요. 그래서 체코에서 찍었습니다.
▲ 남: (영화 속 TV에 희극인) 서영춘 씨가 등장하는데 선배님이 그립고 보고 싶었어요. 감독님이 깊게 들어가는구나, 잠깐이지만 그때로 완전히 돌아가게 됐죠.
▲ 윤: 제가 이 영화로 인터뷰를 수십 번 했는데 서영춘 선생님 얘기하신 분은 남진 선생님이 처음입니다. 선생님 만나니까 대화가 잘 됩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신성일-엄앵란 선생님도 잘 모르더라고요.
▲ 남: 제가 막 데뷔할 무렵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찌개 백반',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떠도 고뿌(컵의 일본어) 없이는 못 마셔요'란 서영춘 씨의 유행 구절은 온 국민이 다했던 거예요. 그야말로 시대의 인물이 서영춘 씨죠. 영화에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장면인데 우리 시대 사람들은 그걸 보면 그때로 돌아가는 거예요. 잠깐이지만 영화 속 극장에서 신성일-엄앵란 씨도 나오는데 요즘 친구들이 보면 아무 감각 없겠지만 우린 그렇지 않아요. 그 시대는 그게 전부였거든요. 영화 '맨발의 청춘'을 7번 봤으니까. 그 시대 사람들이 그걸 보면 그냥 지나가겠어요?
▲ 윤: 그 시대에 신적인 존재였던 선생님의 생활은 어떠셨나요. 전 평범하게 있다가 영화 한 편 잘된 사람인데 선생님은 힘드셨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 남: 난 부모님 잘 만나서 고생은 안했어요. 아버지가 목포일보 사주였고 정치도 했으니까요. 하지만 20살 때 히트해 나이가 어려 처신이 부족했고 실수도 했죠. 명예롭게도 나의 모습이 영화에서 보여진 게 기분 좋고 감사해요. 추억으로 받아들이기보다 '네가 그런 시절이 있었으니 다시 한번 해보라'는 것 같아요. 요즘 휴대폰 속 반주 음악으로 하루 4시간씩 노래 연습을 합니다. 처음 데뷔할 때 열심히 했고 그리고 지금이죠. 지금이 팬들에 대한 마지막 보답으로 '라스트 찬스'입니다. 윤 감독 대단한 친구이고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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