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현장 둘러싼 사회의 비정함 다룬 영화<br />
"정수의 유쾌함이 터널 밖 답답함과 맞물려 아이러니 만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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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포토] 인터뷰 하는 하정우 |
(서울=포커스뉴스) 영화 '터널'의 하정우를 보며 '적역'이라는 단어를 새삼 곱씹었다. 또 누가 그처럼 연기할 수 있을까 감탄하며 내내 그를 대체할 만한 배우들을 헤아렸다. '터널'의 이정수는 하정우만 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극장을 나섰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하정우는 늘 그랬다. 언제나 맞춤옷을 입은 듯 은막 위를 거침없이 누볐다. 출세작인 '추격자'(2008)에선 사이코패스 살인마 지영민으로, '비스티 보이즈'(2008년)에선 한량 중의 한량 재현으로 분해 캐릭터를 선명하게 조각했다.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2012년)의 조직 폭력배 최형배나 '아가씨'(2016년)의 사기꾼 백작 후지와라 역시 다른 배우가 연기하는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하정우의 색이 진하게 묻어있다.
하정우라는 배우의 뛰어난 점은 자신에게 어울릴 법한 역할을 신중히 골라내는 안목에 있다. 이에 더해 주어진 역할이 자신의 몸에 꼭 맞을 때까지 스스로 엄격한 재단의 과정을 거치는 집요함까지 갖췄다. 그래서 하정우는 언제나 '적역'만 맡는다.
신작 '터널'에서도 하정우의 존재감은 빛을 발한다. 터널에 갇힌 남자 이정수의 불안과 희망, 집념같은 감정을 하나하나 결을 살려 표현해냈다. 두 시간이 넘는 상영시간의 2/3를 홀로 책임져야 했지만 지루함을 느낄 새 없이 스크린을 촘촘히 매웠다. '호연(好演)'이라는 수식어로 대충 때우기에는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다.
지난 5일 서울 종로구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하정우는 "일희일비(一喜一悲)의 연속"이라는 말로 개봉을 앞둔 심경을 밝혔다. 영화에 대한 평가들을 살피다 보면 하루는 웃고 다른 하루는 꼭 울게 된단다. 어느덧 베테랑 연기자의 반열에 올랐는데도 "개봉을 앞두고 쿵쾅대는 심장은 어찌할 수가 없다"고 했다.
"느낌은 정말 좋아요. 사랑받을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그런데 또 나만 좋아하는 건 아닌지, 다른 경쟁작들이 더 재미있진 않을지 걱정되기도 해요. 배우를 한다는 게 이렇게 힘들어요. 긴장되고 그러면서도 또 설레고. 내심 '윷' 정도는 기대하고 있어요. '모'까지는 모르겠지만(웃음)."
하정우의 최신작 '터널'은 자동차 판매원으로 일하며 아내와 어린 딸과 살아가는 평범한 가장이 사고로 무너진 터널 안에 갇히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터널에 갇힌 남자(하정우 분), 남자를 기다리는 아내(배두나 분), 남자를 구하려는 구조대장(오달수 분)의 세 사람과 이들을 둘러싼 비정한 사회상을 아울러 그렸다.
재난 현장과 함께 사회상을 담았다는 점에서 2013년 그가 출연한 '더 테러 라이브'와 닮았다. 하정우도 "이야기만 놓고 보면 유사한 점이 있다"고 긍정했다. 하지만 이내 "'더 테러 라이브'의 윤영화는 재난의 상황을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터널'의 이정수는 홀로 고립되면서 바깥의 상황을 잘 알지 못한다. 여기서 오는 아이러니가 있다"고 차이점을 설명했다.
"시나리오를 볼 때 저는 캐릭터보다는 이야기 자체를 먼저 봐요. 이야기가 재미있는지가 최우선이죠. '터널'은 정말 신선했어요. 재난 상황의 무거움과 함께 사회 고발적인 성격이 있는데도 유쾌해요. 자칫 너무 심각해질 수 있는 이야기를 긍정과 유머로 풀어내는 감독의 색깔이 마음에 들었어요."
그의 말처럼 '터널'은 재난 영화들이 일반적으로 취하는 플롯에서 한참 비켜서 있는 독특한 영화다. 시작과 동시에 터널이 무너져내리는 것의 과감함도 신선하지만 재난 발생 이후의 전개도 특별하다. 터널 안팎을 선명하게 대비시키며 극적 아이러니를 만든다.
특종만 노리는 선정적인 언론, 구조보다는 의전에 신경 쓰는 정부, 잇속만 챙기려 드는 기업, 군중심리에 매몰된 대중의 이기심이 맞물리며 사회의 비정함이 드러난다. 정작 고립된 이정수는 자신의 구조를 믿어 의심치 않으며 긍정과 유머로 터널 속 생활에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 관객으로 하여금 쓴웃음을 짓게 한다.
하정우는 "정수의 밝고 유쾌한 모습이 강조될수록 씁쓸한 바깥 현실과 대비를 이루며 극적 재미가 커질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여기에 "주인공이 강한 삶의 의지로 위기를 헤쳐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게 감독의 의도이기도 했고 내 생각도 같았다"고 덧붙였다. 언론시사회 당시 하정우는 이 작품을 통해 "생명의 소중함"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이야기 한 바 있다.
연기에는 도가 튼 하정우지만 터널에 홀로 갇힌 남자를 연기해야 하는 것에 처음에는 막막함을 느꼈다. 스스로 터널에 갇힌 상황을 가정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평소에도 정말 안 좋은 일이 있으면 술을 마시기보다는 운동을 해요. 땀을 쭉 빼고 나면 고민의 무게가 주는 걸 느끼거든요. 그래서 정수를 연기할 때도 좌절하는 모습보다는 밝은 면모를 부각하고 싶었어요. 하정우라는 사람을 많이 투영한 게 정수라는 캐릭터에요."
극 중 상대역 없이 홀로 연기해야 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꼈을 법도 한데 하정우는 "오히려 마음껏 하고 싶은 걸 다 표현했다"고 밝혔다. "물론 서로 연기를 주고받으며 느끼는 재미는 덜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오롯이 홀로 남겨진 사람의 감정과 행동을 표현하는 것에 대한 희열이 더 컸다"고 한다.
그러면서 "배두나, 오달수 두 사람의 존재가 정말 큰 힘이 됐다"고 했다. 극 중 배두나와 오달수는 각각 아내와 구조대장으로 등장해 하정우와 호흡을 맞췄다. 영화의 설정 탓에 전화 통화만으로 소통해야 했지만 이것만으로도 하정우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았다"고 말했다.
"구조대장이 구하러 가겠다고 말하면 정수는 그걸 그대로 믿어요. 어떻게 보면 말이 안 되죠. 어떻게 그렇게 쉽게 믿어요. 그런데 그게 오달수라는 배우의 힘인 것 같아요. 아무런 설명이 없어도 그 사람이 말하면 그냥 신뢰가 가요. 그리고 배두나씨는 정말 멋진 사람이자 배우에요. 자칫하면 밋밋해질 수 있는 세현이라는 인물의 감정을 정말 섬세하게 설득력 있게 표현해내잖아요. 정말 좋은 배우들과 연기했다는 생각뿐이에요."
2002년 '마들렌'으로 데뷔해 올해로 데뷔 15년 차. 그 사이 하정우는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오가며 약 40여편의 작품에 출연해왔다. 대단한 체력에 대단한 열정이다. 쉬지 않고 달려온 만큼 잠시 휴식기를 가질 법도 한데 그는 "영화 100편에 출연하는 것이 꿈"이라며 신발 끈을 조여 묶는다.
하정우가 다시 한 번 '적역'을 맡은 영화 '터널'은 오는 10일 개봉한다.(서울=포커스뉴스) 5일 오후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영화 '터널'의 배우 하정우가 라운드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16.08.05 김유근 기자 영화 '터널'의 스틸 이미지. 하정우는 터널에 갇힌 남자 이정수 역을 맡았다. <사진제공=쇼박스>영화 '터널'의 스틸 이미지.<사진제공=쇼박스>(서울=포커스뉴스) 5일 오후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영화 '터널'의 배우 하정우가 라운드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16.08.05 김유근 기자 (서울=포커스뉴스) 5일 오후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영화 '터널'의 배우 하정우가 라운드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16.08.05 김유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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