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S 소리쳐도 인근 소음에 묻혀<br />
"CCTV·비상벨 등 기본 안전 장비 갖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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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포커스뉴스) "강남 한복판에서도 당했는데…"
지난 17일 밤 서울에서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강남역 인근 상가 화장실에서 20대 여성이 무참히 살해됐다. 시민들, 특히 여성들을 충격과 공포에 휩싸이게 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살해 장소. 서울 제1의 번화가인 강남 한복판에서 살해됐기 때문이다.
이 사건 이후 남녀가 함께 쓰는 공용화장실의 치안 문제가 일제히 보도됐지만 도심 속 안전 사각(死角)지대는 이곳 뿐만이 아니다. <포커스뉴스>는 도심 속 '치안불안지대'를 심층적으로 파헤치는 기획시리즈를 시작한다.[편집자 주]
유동인구 많은 번화가에 위치한 지하보도는 대표적인 치안 취약 공간이다. 지하보도는 지상 도로 아래에 통행을 목적으로 설치되는 것으로 역무원이나 지하철경찰대까지 상주해 있는 지하철 역사와는 다르다. 이처럼 지하철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은 지하보도에서는 신변의 위협을 느낄 때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
지난 27일 '불금'(불타는 금요일)을 시작으로 주말 동안 시민들 틈에서 서울 강남 만큼이나 유동인구가 많은 시청, 서울역, 명동, 이태원 등지의 지하보도를 살펴봤다.
◆ 유동인구 아무리 많아도 늦은 시간엔 '총총걸음'
"요즘 세상이 워낙 흉흉하니까요"
지난 27일 금요일 밤 10시 15분쯤, 서울 시청 인근의 지하보도 입구에서 계단을 총총걸음으로 내려가던 30대 여성은 '잠깐만요'라는 낯선 부름에 흠칫 놀랐다. 그녀를 붙잡은 이가 같은 또래 여성인 기자인 것을 알고서야 가슴을 쓸어 내렸다.
놀란 이유를 묻자 망설임 없이 '강남 여성살해 사건' 부터 언급한다.
인근에서 직장을 다니는 박모(32·여)씨는 "여기는 밤이 되면 노숙자들이 꽤 모습을 보인다"며 "최근에 잔인한 일들이 많이 발생하다 보니 밤에 지하보도 건널 때면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고 말하며 몸을 움츠렸다.
서울시의회 건물 가까이에 있는 이곳 지하보도는 2호선 시청역과 5호선 광화문역 사이에 위치해 있다. 100m 거리에 덕수궁이 있으며 150m 떨어진 건너편에는 서울 시청이 위치해 있어 늦은 시간에도 직장인과 관광객들로 붐비는 곳이다.
하지만 지하보도 안은 분위기가 달랐다.
내부 벽면에 기대 잠자리를 들려는 4명의 노숙자가 띄엄띄엄 보였고 이들 주변에는 온갖 잡다한 것들이 욱여 넣어진 비닐 봉투 뭉치와 어디선가 주워왔을 상자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이들에 의해 점거된 지하보도 안에서는 강한 알코올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일부 노숙자들 중에는 지나가는 시민에게 "아이 씨…"라고 짧게 욕설을 내뱉기도 했다.
박씨는 "회식 때 마신 술로 방금 전까지 알딸딸했는데 이젠 정신이 번쩍 든다"며 "지하보도 밖이 아무리 북적여도 이 안에서 갑자기 어떻게 되면 누가 알겠냐"고 말했다.
실제로 이곳 지하보도에서는 그 흔한 폐쇄회로(CC)TV도 찾아볼 수 없었다.
지하보도가 노숙자들의 잠자리가 된, 대표적인 곳은 서울역 앞 지하보도다. 대낮에 역 주변을 맴돌던 노숙자들은 날이 저물면 이곳 지하보도 안으로 하나 둘 모여든다.
인근에 거주하는 윤모(62·여)씨는 "한창 경찰들이 단속할 때는 안보였는데 언제부턴가 밤이 되면 지하보도 안으로 모이는 것 같다"며 "저녁에는 아무리 돌아가더라도 저쪽은 쳐다보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 CCTV 설치 안 된 곳 태반…"대낮에도 불안"
시민들은 대낮 번화가에서도 지하보도 이용을 조심스러워 했다.
서울 중구의 명동 눈스퀘어 건물에서 100m 직진하면 보이는 중앙우체국 앞 지하보도를 건너면 대각선에 위치한 한국은행 건물 앞에 바로 도착할 수 있다. 이 앞에 건널목을 건너면 바로 남대문 시장이다.
200m 반경에 롯데, 신세계 등 국내 유명 백화점들도 위치해 있어 수많은 인파로 붐비는 곳이지만 지하보도 내부의 공기는 다소 썰렁했다.
5살된 남자아이에게 걸음을 재촉하던 엄마 김모(38)씨는 "낮이지만 지하보도는 으슥하기도 하고 내부로 들어오면 사실상 폐쇄된 공간같다"며 "이 안에서 변이라도 당하면 속수무책일 것 같다"고 말했다.
이곳 지하보도 내부에서도 CCTV를 찾아볼 수 없었다.
2012년 마련된 지하공공보도시설의 결정ㆍ구조 및 설치기준에 관한 규칙에는 감시카메라(CCTV) 설비를 갖출 것을 명시하고 있지만 실제 이를 지키는 곳은 많지 않았다.
이에 대해 이곳에 대한 관리감독 권한을 갖고 있는 서울 중구청 도로시설과의 한 관계자는 "그런게 있어요?"라고 되묻는 등 CCTV 관련 규정조차 숙지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 관계자는 "현재 CCTV를 설치하지 못한 상태인 것은 맞다"며 "앞으로 검토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일부 위험에 설치된 비상벨 역시 없어 위협 상황을 외부로 알릴 수 없다. 한 마디로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길이 막막한 구조다.
지하보도 치안 상황이 우려되는 건 남성도 마찬가지다.
이날 중앙우체국 앞 지하보도에서 만난 성모(56)씨는 "직장이 근처인데 회식하고 늦게 귀가할때 이곳을 지나가려면 아무리 남자라도 무섭다"며 "술취한 남성에게 접근해 뻑치기 같은거 많이 한다던데, 지하보도 안에서는 무슨 일을 당해도 밖에 있는 누군가에게 알리기 힘든 구조인 것 같다"고 말했다.
성씨의 말처럼 지하보도 안에서 육성으로 소리쳐도 시내버스와 승용차 주행 소리 등 인근 소음에 묻혀 밖에서 알아채기 힘들다.
◆ 대안으로 떠올랐던 '그라피티'…예술 아닌 '흉물'로 방치
지하보도 치안문제에 대한 공감대가 확산되면서 한때 지하보도 내부에 그라피티(공공장소에 하는 낙서예술) 등 예술적 요소를 결합해 음침한 분위기를 바꿔 보자는 움직임도 있었다.
하지만 일부 지하보도는 이것 때문에 오히려 흉물로 변한 곳도 있다.
서울 용산구 이태원 지하보도가 대표적이다.
6호선 녹사평역 2번 출구에서 나와 약 400m 직진하면 보이는 이태원 지하보도를 이용하면 건너편에 위치한 '핫플레이스'로 꼽히는 경리단길에 한번에 도달할 수 있다.
인근에 건널목은 없다. 200m 거리에 있는 육교를 이용해서 건너편으로 넘어가면 다시 200m를 걸어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
지하보도 내부에는 오래 전에 그려진 듯한 색색깔의 그라피티가 어지럽게 벽면을 채우고 있다. 시설 관리 내용을 명시해 놓은 표지판과 주변 지리 안내도에는 붉은색 페인트칠이 돼 있어 내용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다.
이러한 내부 상황은 초저녁의 번화가 중심에 있다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음산한 기운을 자아냈다.
지난 29일 일요일 저녁 8시쯤, 이곳 지하보도에서 만난 김모(22·여)씨는 유독 큰 목소리로 친구와 깔깔거렸다.
이곳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김씨는 "사실 무서워서 친구랑 일부러 큰 소리로 말하며 내려왔다"며 "특히 이곳 지하보도는 과격한 내용의 페인트칠이 난무해 있어 마치 할렘가를 연상케 한다"고 털어놨다.
함께 있던 윤모(22·여)씨는 "건널목이 따로 없고 지하보도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놨으면 안전관리라도 잘해야 하는거 아니냐"며 "CCTV가 있다고 해서 범죄가 아예 불식될 거라는 기대는 안하지만 최소한 CCTV가 부착된 모습만 봐도 안도감은 든다"며 "비상벨 등 기본적인 안전시설도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어 "지하철, 공원 등 공공장소에 소화기, 인공호흡기 등 안전장비가 갖춰져 있듯이 성범죄를 비롯한 강력 범죄가 발생하기 쉬운 범죄취약지역에는 치안을 위한 안전시설을 갖추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이곳 지하보도를 관리하는 용산구청 토목과에서는 이러한 시민들의 요구를 의식한 듯 "올해 행정예고 기간을 거쳐 CCTV를 설치할 예정"이라며 "한정된 예산에서 운영하다 보니 그동안 이 부분이 우선순위에서 밀렸던 게 사실"이라고 해명했다.
흉물처럼 방치된 지하보도 내부 상황에 대해서도 "그동안 드러난 문제점들을 보안해서 앞으로 진행될 벽화 사업에 반영할 예정"이라며 "용산경찰서에 협조를 구해 무분별한 낙서 행위를 불식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전했다.
전문가들도 지하보도의 치안 강화를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엔 대체로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노성훈 경찰대학 행정학과 교수는 "지하보도의 경우 시민 통행량이 줄어들때 대표적인 범죄 취약지역"이라며 "범죄 예방을 위해선 환경적 요인을 개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CCTV나 비상벨 등이 설치됐을때 일반시민에게 안도감을 줄 수 있고, 잠재적 범죄자에게는 범죄욕구를 감퇴시키는 효과도 있다"고 덧붙였다.28일 오후 서울 시청 인근의 지하보도에서 한 노숙자가 자리를 정리하고 있다. 박지선 기자 29일 오후 서울 중구의 한 지하보도의 모습. 대낮에도 사람이 없어 썰렁하다. 박지선 기자 29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이태원 인근에 위치한 지하보도. 박지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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