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격호(94) 롯데그룹 총괄회장의 ‘성년후견 개시 심판 청구’ 사건에서 정신감정을 담당하게 될 기관이 결정됐다.
서울가정법원 가사20단독 김성우 판사는 9일 오전 10시부터 진행된 신 총괄회장에 대한 성년후견 개시 심판청구 사건 2차 심리에서 ‘서울대병원’을 정신감정 담당기관으로 결정했다.
당초 신 총괄회장 측인 신동주(61)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은 서울대병원, 신 총괄회장의 넷째 여동생 신정숙(78)씨는 삼성서울병원 등을 각각 정신감정기관으로 지정해달라고 요청했다.
양측은 논의 끝에 신 전 부회장 측 뜻에 따라 서울대병원에서 정신건강 이상 여부를 판단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신 총괄회장이 그동안 서울대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왔기 때문에 신정숙씨 측이 편의를 위해 이를 받아들인 것으로 풀이된다.
이로써 신 총괄회장은 4월말까지 서울 종로구 연건동에 위치한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정신감정을 받게 된다.
재판부는 이같은 자료를 바탕으로 향후 성년후견 개시 여부와 만약 성년후견이 개시된다면 누가 성년후견인으로 되는 것이 적절한지 등을 집중적으로 살펴볼 방침이다.
신 총괄회장에 대한 성년후견인 지정 여부가 결정되기까지는 6개월 가량의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통상적으로 성년후견인이 지정되기까지 6개월에서 1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 총괄회장 건의 경우 한 그룹의 명운을 가를 중요한 심리인 만큼 법원의 집중적이고 세부적인 심리가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법조계 중론이다.
만약 법원이 신 총괄회장의 후견 개시를 결정하면 그동안 제기된 건강이상설이 확인됨과 동시에 신 총괄회장은 자력으로 사무를 처리할 수 없게 된다.
실질적으로 경영권을 상실하는 셈이다.
또 성년후견 개시 여부만큼 중요한 것이 누가 후견인으로 지정되느냐는 것이다.
신동주 전 부회장이나 신동빈(60) 롯데그룹 회장 중 한쪽이 결정될 경우 양쪽 모두 타격을 입게 된다.
이같은 점을 고려해 법원이 복수의 후견인을 지정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성년후견인은 복수 지정이 가능한 만큼 법원이 예민한 부분을 고려해 복수 후견인을 지정할 가능성이 높다”며 “만약 그렇게 되면 신 총괄회장의 법적 권리 행사는 복수 후견인의 합의 후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사실상 입장이 정면으로 부딪히고 있는 사람들이 복수 후견인으로 지정될 경우 이 역시 그룹 경영권 분쟁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며 “이번 심리를 단순한 건강이상 입증절차가 아닌 경영권 분쟁의 변곡점으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설명했다.
앞서 법원은 지난달 3일 오후 4시부터 ‘신격호 성년후견 개시 심판 청구’에 대한 첫 심리를 열었다.
이번 재판은 지난해 12월 18일 신정숙씨가 신 총괄회장에 대한 성년후견인 지정을 신청한데 따른 것이다.
특히 이날 재판에서 눈길을 끈 것은 신 총괄회장의 법정 출석이었다.
당초 신 총괄회장 측은 성년후견 개시 심판에 강한 불쾌감을 나타내며 불출석 의사를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신 총괄회장이 직접 참석하겠다는 의견을 밝히며 당일에서야 전격 출석이 결정됐다.
가정법원 앞에 도착한 신 회장은 자신의 건재함을 증명하려는 듯 미리 준비된 휠체어 탑승을 거부하고 지하 4층 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까지 직접 지팡이를 짚고 이동했다.
‘건강상에 문제가 있느냐’, ‘여기 왜 왔는지 아느냐’ 등 취재진의 질문에는 답변하지 않았지만 최악의 건강상태가 예견된 상태에서 보인 신 총괄회장의 행동은 그동안 건강이상설을 불식하는 듯 보였다.
게다가 신 총괄회장이 재판정에서 판사의 물음에 막힘없는 대답을 내놨다는 후문마저 전해지면서 전세가 신동주 부회장 쪽으로 기우는 듯 보였다.
그러나 상황이 반전된 것은 신 총괄회장이 심리를 마치고 나온 후부터다.
40분 가량의 심리를 받은 뒤 오후 4시 40분 가정법원을 떠나기 위해 지하 4층 주차장에 모습을 드러낸 신 총괄회장은 휠체어에 탑승해 있었다.
또 취재진의 질문에는 여전히 아무런 답을 내놓지 않았다.
이후 신 총괄회장은 같은날 오후 5시 40분 자신의 집무실이 있는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로 이동했다.
신관 엘리베이터를 통해 34층 집무실로 가려던 신 총괄회장은 정혜원 상무에게 호텔을 둘러보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정 상무와 호텔 총지배인, 경호원 등 6~7명 직원들이 신 총괄회장 옆을 지키며 롯데호텔 1층을 10여분간 돌기 시작했다.
신 총괄회장은 수행하는 호텔직원들이 얼굴을 가까이 대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만큼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여기가 어딘가?”, “이 호텔의 객실수는 얼마나 되는가?”, “객실이 몇 프로나 찼는지” 등을 반복해서 물었다.
이에 대해 호텔 관계자도 “소공동 본점입니다”, “저희 공간은 1120실입니다”, “네 (롯데호텔이) 국내에서 제일 큽니다. 총 5300실입니다”, “겨울은 비수기라 예약률이 저조한데 다음달이면 좀 올라갑니다” 등이라는 답을 두세 번씩 반복했다.
신 총괄회장은 오랫동안 이 호텔 로비를 지켜온 총지배인을 못 알아보고 “누구냐”고 물어 “지배인입니다”라고 다시 소개하기도 했다.
현장에 있던 기자들을 통해 이같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일각에서는 신 총괄회장의 건강이상을 확신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동행했던 정혜원 SDJ 상무는 “호텔 객실수 질문은 매번 똑같이 하신다”며 “성년후견인 지정 신청 심리가 끝난 후 오랜만에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탄력을 받으셨는지 백화점도 둘러보자고 하시는 걸 오히려 말렸다. 너무나 정정하시다”라고 말해 의혹을 불식하려했다.
신동주 부회장도 역시 반격에 나섰다.
지난달 14일 신격호 총괄회장이 자신을 후계자로 지목하는 인터뷰 영상을 공개하면서 롯데홀딩스 임시 주주총회 소집을 요청한 것이다.
경영복귀 이후 일본 롯데를 어떻게 운영할지에 대한 계획도 발표했다.
그러나 결과는 신동빈 회장의 완승이었다.
6일 오전 일본 롯데홀딩스 본사 열린 롯데홀딩스 임시 주총에서 신동주 전 부회장이 상정한 ‘신동빈 회장 등 현재 경영진 6명에 대한 해임안’이 부결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분간 롯데그룹 경영권 분쟁은 계속될 전망이다.
신동주 전 부회장이 오는 6월 롯데홀딩스 정기 주주총회에서 신 회장 등 현 경영진을 해임하고 새로운 경영진 등 선임을 요구하는 안건을 다시 한 번 상정할 계획이기 때문이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계속해 주주들에게 인정받지 못한 신동주 전 부회장이 이번 성년후견인 제도로 반전드라마를 쓸지, 재개 불능상태가 될지는 지켜봐야 할 일”이라며 “신동주 전 부회장 입장에서는 마지막 히든카드인 건 분명하다”고 말했다.
한편 신격호 총괄회장은 지난 7일 롯데그룹의 모태인 롯데제과 등기이사직에서 물러났다.
1967년 롯데제과가 등장한 이후 49년만이다.
롯데그룹은 “신 총괄회장이 올해 95세로 고령인데다 성년후견인 신청 심리를 통해 의사결정능력을 판별 중인 상황인 만큼 정상적인 업무수행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현재 신 총괄회장이 이사직을 유지하고 있는 계열사는 호텔롯데·롯데쇼핑·부산롯데호텔·자이언츠구단 등과 일본 롯데홀딩스 등이다.
재계에서는 신 총괄회장이 남은 계열사의 등기이사직에서도 순차적으로 물러날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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