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움베.png |
(서울=포커스뉴스) 베스트셀러 소설가이자 우리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 중 한 명인 움베르토 에코가 지난 19일 이탈리아 밀라노 자택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뒀다. 향년 84세.
움베르토 에코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과 중세를 배경으로 한 소설에서부터 기호학과 미학, 문화 비평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이 포괄할 수 있는 지식과 상상력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광범위한 영역에서 경이로운 저술 활동을 펼쳐왔다.
에코는 한 인터뷰에서 스스로를 철학자라고 소개하며 자신에게 소설을 쓰는 일은 그저 주말 시간을 할애하는 시간제 아르바이트와 다를 바 없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그는 1980년 48세의 나이에 쓴 '장미의 이름'으로 베스트셀러 작가로 변신하며 전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에코는 1932년 이탈리아 북부 지방의 소도시 알레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학위 논문은 '성 토마스의 미학적 문제'였다. 1960년대부터 활발한 이론적 저술로 서구 인문학계의 기린아로 떠올랐다. 1975년 볼로냐의 기호학 정교수로 임명됐고 1980년에 발표한 소설 '장미의 이름'은 학자들 사이에서나 알려져 있던 이 인물에게 전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줬다.
이후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지도적인 기호학자이자 인문학자로서, 각종 언론 매체 기고를 통해 현실에 대해 발언하는 지식인으로서 에코는 전 세계의 주요 대학에서 강연하며 커다란 영향을 미쳐 왔다. 2005년 Prospect/Foreign Policy 공동 조사에서 움베르토 에코는 노엄 촘스키에 이어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식인' 2위에 이름을 올렸다. 3위는 리처드 도킨스였다.
1980년대 초반 유럽 최대의 베스트셀러 중 하나였던 움베르토 에코의 첫 장편소설 '장미의 이름'이 한국에 상륙한 것은 1986년 5월의 일이다. 고(故) 이윤기 선생(1947~2010)의 번역으로 당시 신생 출판사였던 열린책들(1986년 창립)에서 출간됐다.
초판이 판매되는데 몇년이 걸렸지만 이 책은 번역자와 출판사에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 책이 됐다. 번역자 이윤기는 인터넷도 위키피디아도 없던 시절 오직 사전과 자신이 갖고 있던 서양 문화 전반에 대한 교양, 그리고 전공이었던 신학 지식을 활용해 이 7~8개 언어가 등장하는 책을 번역해 냈다.
이는 일본(1990년)보다도 앞선 것이었고 그 뒤 이윤기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한 번역가로 이름을 날리게 됐다. '장미의 이름'이 출판사 열린책들에 미친 영향은 좀 더 복잡하고 예언적인 것이었다.
1989년 장 자크 아노가 감독하고 숀 코너리가 주연한 영화 '장미의 이름'이 한국에 개봉된다. 영화의 개봉은 이 소설에 대한 관심을 대중적으로 환기시키는 계기가 됐다.
잘 안 팔리던 책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가며 6만 부가 판매됐다. 갑자기 사람들은 중세의 수도원이 얼마나 흥미롭고 신비스러운 곳인지 깨닫게 됐고 이런 이상한 소설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중세 문명과 기타 모든 것에 해박한 볼로냐의 기호학 교수 한 사람밖에 없다는 것을 납득하게 된다.
1990년대는 한국 도서 시장을 휩쓸던 영미권의 대형 베스트셀러가 서서히 퇴조하고 유럽 소설이 관심을 모으게 되는 시기였는데 그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던 소설의 하나가 '장미의 이름'이었다. '장미의 이름'의 모티프, 즉 금지된 책을 둘러싼 살인사건이라는 소재는 한국 문학에도 일정한 영향을 남겼다.
1990년 에코의 두 번째 장편소설 '푸코의 추'가 역시 이윤기의 번역으로 열린책들에서 출간됐다. 이 책은 베스트셀러 1위까지 도달했다. '번역이 불가능해 보이는' 책을 이번에도 번역해 낸 이윤기의 명성도 더욱 올라갔다. '푸코의 추'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정식 저작권 계약이 된 에코의 소설이다.
전작 출간이 이루어지기까지 국내 처음으로 소개된 에코의 이론적 저작은 '기호학 이론'(서우석 옮김, 문학과지성사, 1985)이다. 이때의 방점은 에코(전혀 낯선 인물)보다는 새로운 학문인 '기호학'에 있었다. 그러나 '장미의 이름'과 '푸코의 진자'의 성공은 에코 '전문서' 출간의 양상을 다르게 바꾸어 놓았다.
두 소설을 접한 독자들은 움베르토 에코가 쓴 책은 다 읽어보고 싶은 욕구를 느꼈으며 다른 이론적인 책들 역시 소설 못지않은 흥미가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왜냐하면 소설 '장미의 이름'과 '푸코의 진자' 자체가 끊임없이 독자의 지적 욕구를 자극하는 방향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994년에 '논문 잘 쓰는 방법', '대중문화의 이데올로기'를 시작으로 열린책들은 에코의 학술서와 에세이들을 계속 출간했다.
에코의 비소설 중 가장 인기를 모은 책은 1999년 출간된 '세상의 바보들에게 화내는 방법'이다. 제목이 알려주듯 현대 문명에 대한 비평인 이 책은 에코의 박식한 유머의 최대치를 맛볼 수 있다는 평을 받으며 소설이 아닌데도 베스트셀러가 됐다. 현재까지 20만 부가 판매됐다. 번역자 이세욱은 뒷날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2008) 이후 에코의 신작 소설들을 중역이 아닌 이탈리아어 원전으로 번역하는 작업을 도맡게 된다.
이후 열린책들은 아예 에코의 모든 책을 번역 출간하기로 내부 방침을 정한다. 열린책들은 그렇게 해서 출간해 온 에코의 책이 30종이 넘자 2009년 '에코 마니아 컬렉션'이라는 이름으로 리뉴얼을 했다. 컬렉션은 총 26권인데 '장미의 이름' 같은 소설 류는 들어가 있지 않다. 열린책들이 25년간 펴내온 에코의 비소설 저작들이 모여 있다.
움베르토 에코에 관한 한 한국 독자는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호사를 누려 온 셈이다. 에코의 모든 책을 출판해 온 이탈리아의 봄피아니 출판사는 한국의 '에코 마니아 컬렉션'이 세계에 유일한(이탈리아에도 없는) 총서라고 확인해 준 바 있다.움베르토 에코가 지난 18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밀라노 자택에서 향년 84세로 타계했다.ⓒ게티이미지/멀티비츠 '에코 마니아 컬렉션'.<사진제공=열린책들>
[ⓒ 부자동네타임즈.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