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까지 일본서 살아…우연한 계기로 한국서 일본 도서 접해 <br />
배 할머니 "앉을 곳만 있다면 단 5분이라도 책 읽고 싶어"
(서울=포커스뉴스) "나는 독서가 너무 좋아. 5분이라도 앉아 있을 시간이 있으면 늘 책을 읽는 걸."
배순의 할머니(85)는 경기 광명시 광명동 광명새마을시장 한 켠에서 도라지, 수수 등 각종 야채를 가져다 팔며 작은 가게를 꾸려가고 있다.
그러나 이 시장에서 배 할머니는 그냥 야채가게 할머니가 아니라 '매일 일본어로 된 책을 읽는 독서광(狂) 할머니'로 더 유명한 인사다.
시장 상인들에게 '여기에 일본 책 읽는 할머니가 누구냐'고 물으면 바로 '아~그 할머니'라고 말할 정도로 배 할머니의 인지도는 꽤 높다.
근처 분식집 주인은 “그 할머니를 보면 맨날 책 읽으면서 앉아 계셔”라고 말할 정도였다.
가게 판매대에는 일본어로 쓰여진 책들이 수북이 놓여있었다. 판매대는 할머니의 책꽂이나 다름없었다.
미수(米壽·88세)를 앞둔 고령인데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매우 정정했다.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도 단어 하나, 말 한마디 등에서 침착함이 느껴졌다.
배 할머니는 일본에서 나고 자랐다. 할머니의 아버지는 할머니가 태어나기도 전인 1927년 돈 벌러 일본으로 떠났다.
이후 어머니가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가면서 할머니가 태어났다. 할머니와 일본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배 할머니는 1945년 해방이 되면서 부모와 함께 전남 벌교로 돌아와 정착했다. 나이 15세 때였다.
어릴 때는 손재주가 좋아 디자인 공부도 했다. 학원비가 없어 학원에서 청소일을 하며 강습비를 충당했을 정도였다. 그때 익힌 기술로 아직도 가끔 스스로 옷도 만들어 입기도 한다.
배 할머니는 23세에 결혼을 했지만 얼마되지 않아 폐질환으로 남편을 먼저 하늘나라에 떠나 보낸 아픔을 갖고 있다.
남편 없이 어린 4남매를 키우느라 한복 바느질 작업, 나물과 인삼 장사 등 안해 본 일이 없었다.
매일 이렇게 독서하는 이유를 물었다.
배 할머니는 "쉰 살 쯤 우연히 마을 이웃이 일본어 책을 두 권 줬어. 당시는 박정희 정권 때라 일본어 책을 사기도 어려웠는데 너무 좋았지"라고 회상했다.
배 할머니는 그 두 권의 책으로 독서 세계에 빠져들게 됐다.
그 무렵 할머니는 애지중지하던 둘째 아들이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을 했다. 그래서 아들 뒷바라지를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먹고 살기에 바빴던 배 할머니는 한동안 책을 잊고 살았다. 그러나 늘 마음 한켠에서는 책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지하철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한 청년이 "서울 종로에 있는 큰 문고에 책이 많다"는 말을 해줬다.
얼마 후 곧장 청년이 말해준 서점으로 달려가 읽고 싶은 일본어 책을 마음껏 샀다. 그리고는 실컷 책을 읽기 시작했다.
배 할머니는 "그렇게 큰 곳에 책이 이렇게나 많던 걸"이라고 처음 대형 서점을 찾았을 때 행복감을 잊을 수 없다고 설명했다.
"요새 청년들 책을 잘 안 읽잖아요. 근데 할머니 정말 대단하세요"라고 물어보자 할머니는 "아니야. 그냥 나는 내가 좋아서 읽는 걸"이라며 쑥스러워했다.
배 할머니는 시사와 역사에 대해 매우 관심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주로 보는 책도 관련 분야가 많았다.
배 할머니는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는 편이라고 했다.
어느 날 서점에서 책을 고르고 있는데 한 청년이 다가와 '지하철에서 책 읽는 그 할머니 맞으시죠?'라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고 미소 지었다.
배 할머니는 버스와 지하철에서 단 5분이라도 시간이 나면 책을 읽는다.
그러나 책을 읽는 할머니를 보고 호기심을 느낀 주변 사람들이 "그 뜻이 뭔지나 알고 읽나"라고 물으면 그렇게 속상하단다.
그래서 특히 지하철을 탈 때에는 노약자석을 피하고 가능한 일반석에 앉는다고 나름의 고충을 털어놓았다.
베 할머니는 대화를 나누면서도 2차 세계대전, 기독교 역사 등 다양한 이야기를 쉴새 없이 해주셨다. 이 모든 지식은 독서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했다.
고령인 할머니의 시력이 걱정돼 상태를 물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안경 없이도 책을 볼 때가 많다고 했다.
백내장 수술을 얼마전에 했지만 독서하는데 문제는 없다고 배 할머니는 전했다.
할머니는 같은 책을 여러 번 읽는다고 하셨다. 야속하게도 기억이 잘 나지 않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책을 3번 정도 읽다 보면 정확하게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것도 '독서의 기쁨'이라고 했다.
할머니는 인터뷰 도중 가게 한 켠에 둔 10여권의 일본어 책을 보여줬다. 산케이신문 '정론(正論)' 책을 비롯해 할머니는 일본어로 책 제목을 자신있게 읊기도 했다.
할머니는 어렸을 적부터 독서가 습관이라고 했다. 일본은 학교교육 자체에 독서가 포함돼 있다며 그 당시의 습관이 현재까지 남아있다고 설명했다.
할머니는 일본어으로 쓰여진 책을 놓으신 적이 없다. 굳이 국내도서보다 일본도서를 읽는 이유는 일본어가 더 편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마지막으로 할머니에게 책을 읽는 '이유'에 대해 물었다. 할머니는 "그냥 세상 돌아가는게 궁금하잖아. 어렸을 때부터 책을 읽어와서 그런지 그냥 습관이야"라고 겸손하게 대답했다.지난 22일 오후 배순의 할머니가 인터뷰를 마치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신성아 기자 2015.12.22 sungah@focus.co.kr배순의 할머니가 주로 즐겨 읽는 일본 도서. 석진홍 기자. 2015.12.22 jin3874@foc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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