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50년 걸린 무죄 판결…'인혁당 사건'의 서막
(서울=연합뉴스) 1964년 8월14일 김형욱(1925∼1984) 중앙정보부장이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북한 노동당의 지령을 받고 국가 변란을 기획한 인혁당 사건을 적발해 일당 57명 중 41명을 구속하고 16명을 수배 중'이라는 게 발표의 요지. '사법 살인'으로 이어진 인혁당 사건의 서막이었다.
인혁당 사건은 한일회담과 대일 굴욕외교를 반대하는 시위가 거셌던 시국에서 터져 나왔다. 학생들을 중심으로 반정부 시위가 이어지자 정부가 6월3일 비상계엄을 선포했고, 정국은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일부 검사들이 사표를 던지면서 무리한 기소에 저항했지만 도예종(1924∼1975) 씨 등 13명은 결국 재판에 넘겨졌고 이듬해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10년 뒤인 1974년 중앙정보부는 유신 반대 투쟁을 벌인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의 배후로 인혁당 재건위원회(재건위)를 지목하고 1차 인혁당 사건 연루자를 다시 잡아들였다. '2차 인혁당 사건'인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다.
1차 인혁당 사건 때 징역 3년을 선고받았던 도씨 등 8명이 사형을 선고받았고 18시간 만에 형이 집행됐다. 피해자들은 항변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스위스 국제법학자협회는 '사법사상 암흑의 날'이라는 성명을 냈다.
'사법 살인'으로 불렸던 2차 인혁당 사건의 유족들은 2002년 법원에 재심 신청을 내 2007∼2008년 무죄를 선고받았다.
1차 인혁당 사건의 피해자들도 2011년 재심을 청구했고 2015년 5월 무죄 판결을 확정받았다. 인혁당의 실체를 둘러싸고 '서클 수준의 조직'이라는 주장과 '강령을 갖춘 당 조직'이라는 주장이 엇갈린 가운데 대법원은 "인혁당이 강령을 가진 구체적 조직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지 않는다"는 원심을 확정했다. 1965년 대법원의 유죄 판결 후 50년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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