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필리핀서 봉사 앞장서는 한상 이원주 대표

편집부 / 2015-08-08 08:02:01
'바나나 리퍼블릭' 브랜드 제조자…연 매출 5천만 달러
"정직·신용 지키며 말보단 행동으로 살자는 신념 실천"

<인터뷰> 필리핀서 봉사 앞장서는 한상 이원주 대표

'바나나 리퍼블릭' 브랜드 제조자…연 매출 5천만 달러

"정직·신용 지키며 말보단 행동으로 살자는 신념 실천"



(마닐라<필리핀>=연합뉴스) 왕길환 기자 = "바나나 리퍼블릭(Banana Republic), 제이 크루(J. CREW)를 아십니까?"

둘 다 미국의 유명한 여성 의류 브랜드이다.

바나나 리퍼블릭은 전 세계에 500개가 넘는 매장을 둔 갭(GAP)의 자회사이자 브랜드명이고, 제이 크루는 젊은이들에게 인기 있는 브랜드이다. 그렇다면 이들 브랜드는 누가, 어디에서 제조·생산할까?

바로 필리핀 마닐라 인근의 공장 3곳에서 주문자 상표부착 방식(OEM)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케이 리 패션(KAY LEE FASHION)이라는 회사가 미국 본사로부터 디자인을 받아 2천700여 명의 직원과 함께 전량 생산한다.

'코리아에서 온 이씨가 세운 패션업체'라는 뜻의 이 회사는 필리핀 한인사회의 '맏형'격인 이원주(62) 대표가 운영하고 있다. 연간 5천만 달러어치의 의류를 생산해 납품한다.

작은 체구에 선한 얼굴을 한 이 대표를 8일 필리핀 마닐라의 뉴월드호텔 로비에서 만났다. "할 얘기가 없다"고 몇 번이나 거절한 끝에 이뤄진 인터뷰였다.

이 대표는 세계한인무역협회(월드옥타) 필리핀 지회가 올해 처음으로 주최한 '아세안(ASEAN) 통합 차세대 무역스쿨' 취재차 현지를 방문한 기자를 끝까지 내치지는 못했다. 그는 2001년부터 4년간 필리핀지회장을 지냈고, 현재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인생의 과반인 35년을 필리핀에서 살았다.

"필리핀이 마음 편하고 끌린다"는 막연함 말고도 그가 필리핀에 남다른 애정을 갖는 이유는 뭘까.

경남 고성 출신인 그는 고교 졸업 후 잠시 취직했다가 군에 입대했다. 1976년 제대하고서 부산의 국제그룹 산하 조광무역에 입사하면서 의류업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와이셔츠 공장 말단 사원으로 시작해 원단 재단, 바느질, 포장 등 전 과정을 배웠다.

그러던 중 회사가 필리핀 파견 근무자를 찾자 그가 가장 먼저 손을 들었다. 1980년 필리핀 땅은 그렇게 밟았다. 하지만 당시 필리핀은 강성 노조 때문에 골머리를 썩이던 시기. 조광무역도 노사 쟁의에 휘말렸고, 그도 어쩔 수 없이 1년여의 짧은 경험을 끝으로 회사의 철수 명령과 함께 귀국했다.

"막 필리핀에 맛을 들여가던 시기였어요. 무한한 가능성을 봤다고나 할까요. 필리핀 사람들은 일도 열심히 하지 않고 게을렀어요. '근면·능력·끈기만 있으면 이곳에서 뭔가를 만들어낼 수 있겠구나' 하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꼭 다시 오겠다고 생각했죠."

기회는 빨리 왔다. 1983년 미국 의류회사가 필리핀 공장에서 일할 한국인 매니저를 찾는다는 구인광고를 보고는 주저 없이 찾아갔다.

관리자로 다시 필리핀 땅을 밟은 그는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살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열심히 월급을 모아 친구와 함께 여성의류 하청 공장을 설립했다. 낮에는 회사 매니저로 근무하고, 밤에는 공장에서 불을 밝혔다. 그렇게 3년 반을 주야로 일하던 그는 회사를 그만뒀고 사업에만 몰두했다.

1년여 만에 직원이 300명까지 늘면서 동업 관계도 정리했다. 1987년 자본금 25만 달러를 투입해 여성복 전문의류회사인 '케이 리 패션'을 창업했다.

그러나 기업 경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자본 부족으로 신용장을 열기가 만만치 않았고, 납기를 맞추느라 밤을 새우는 일이 지속됐다. 또 노조원들의 불법파업으로 폐업하고 소송에 휘말리는 시련도 겪었다. 이런 마음고생으로 쓰러져 몇 차례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했던가. 가까스로 수습하고 공장을 돌렸다. 미국, 유럽 회사로부터 하청의 하청을 받는 구조 때문에 여전히 매출은 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89년부터 직접 주문을 받으면서 회사는 잘 돌아가기 시작했다.

200명이던 직원은 10배가 넘어 2천500명까지 늘었고, 매출도 동반 상승했다. 2009년에 터진 미국발 금융 위기로 타격을 입긴 했어도 지금까지 꾸준히 성장세다.

그는 왜 여성복만 취급할까.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여성복은 변화가 많아요. 소재도, 디자인도 어려워요. 남성복은 단순해서 아무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여성복을 합니다. 어려운 것을 해야 기회가 오거든요. 처음에는 블라우스, 팬츠 등만 했지만 지금은 정장류 코트, 드레스, 캐주얼 재킷 등 부가가치가 높은 의류를 만들고 있죠. 이 또한 남들이 잘 안 하려고 하죠."

돈을 벌었다는 소문이 나자 필리핀 한인사회는 그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많은 한인단체가 봉사해 달라고 요청했다. 거절하지 못하고 봉사에 참여하면서 여러 단체장을 지내기도 했다.

필리핀한인총연합회장(2011∼2012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11∼15기), 필리핀 한국국제학교 이사 등이 그것이다. 특히 한국국제학교 건축위원장을 맡아 9년 만에 완공하는 성과를 이루기도 했다.

필리핀 현지 사회에도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내놓고 있다. 필리핀 JTS 대표를 맡아 민다나오 지역에 학교를 짓고 있다. 2003년부터 지금까지 46개 지역에 130여 개교를 신축했다.

JTS(Join Together Society)는 법륜 스님이 이끄는 신행 단체인 정토회가 주축이 돼 해외 봉사활동을 벌이는 사단법인이다.

"학교 건축 기금은 한국 JTS에서 마련해 보내주지만 건설 현장은 제가 관리 감독합니다. 한 달에 5일 정도는 비행기로 1시간 20여 분 거리에 있는 민다나오의 건축 현장을 돌아봅니다."

'왜 그렇게 힘든 일을 하느냐'고 묻기도 전에 그는 "어찌 보면 미친 짓이죠"라면서 법륜 스님과의 인연을 소개했다. 스님은 2002년 막사이사이상을 받으,려고 필리핀을 찾았다. 이 상은 필리핀의 전 대통령 라몬 막사이사이를 기리기 위해 1957년 제정된 국제적인 상으로 '아시아의 노벨상'으로 불린다.

"당시 이 상의 심사위원이었던 안토니오 레데스마 주교가 스님에게 필리핀의 빈곤, 문맹, 질병 퇴치에 관심을 가져 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리고 내전으로 몸살을 앓는 민다나오의 학생들이 학교 건물이 없어 공부를 하지 못한다는 얘기도 들었죠. 그래서 스님은 상금 5만 달러를 필리핀 사람을 위해 쓰기로 하고 기부했죠. 저에게도 함께하자고 제의했던 것입니다."

이 회장은 2013년 11월 8일 필리핀 마라보시를 강타한 슈퍼 태풍 하이옌으로 폐허가 된 마을 복구사업에도 JTS를 대표해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1년 3개월 동안 마라보시 비사야 지역의 학교 65개교를 복구하고 21개교를 새로 지어줬다.

'정직'과 '신용'을 수레바퀴 삼아 말보다는 행동을 앞세워 살아간다는 신념을 실천한 그에게 한국 정부는 2011년 국민포장을 서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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