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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1880∼1953) 변호사의 외손자인 오이시 스스무(大石進·80) 씨가 연합뉴스의 인터뷰에 응하며 자신이 쓴 '변호사 후세 다쓰지'라는 책을 들어 보이고 있다. |
<광복70년> "2·8 독립선언, 세계적으로 평가할 내용"
2·8선언 조선인 무죄 주장한 후세 다쓰지 변호사 손자 인터뷰
(도쿄=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2·8 독립선언 사건으로 기소된 조선인 청년들의 무죄를 주장한 '과격한' 일본인 변호사가 있었다.
일본인으로는 처음으로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은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1880∼1953) 변호사가 그 주인공이다.
후세 변호사의 외손자 오이시 스스무(大石進·80) 씨는 "후세 다쓰지는 과격하기 때문에 변호인단에 넣어주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고 당시 그를 바라보던 주위의 시각을 언급했다.
유년기를 후세 변호사의 집에서 보낸 오이시 씨는 5년 전에 외조부의 일대기를 담은 책 '변호사 후세 다쓰지'를 펴내기도 했다.
그는 이 책이 "가족의 정에 휩쓸리지 않고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쓴 것"이라고 했는데 그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인터뷰 내내 후세 변호사를 '할아버지'나 '조부'가 아닌 '후세 다쓰지'로 칭했다.
오이시 씨는 변론에 참여한 다른 유명한 변호사들이 유죄를 인정하고 집행유예 판결을 받자고 했으나 후세 다쓰지가 "독립선언은 정당한 행위다. 죄가 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일본 정부가 1918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시베리아에 파병(대소간섭 전쟁, 일명 시베리아 출병)해 놓고 어떻게 독립을 외친 조선인을 탄압할 수 있느냐는 것이 후세 변호사의 주장이었다는 것이다.
오이시 씨 역시 "2·8 독립선언서에는 윌슨이 제1차 세계대전의 해결을 위해 제시한 조건이 전부 포함돼 있고 민족의 독립사상이라는 것이 확실히 드러났다"며 "세계적으로 평가할 만한 것이고 이론적으로도 설득력이 있다"고 조선 청년의 거사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후세 변호사가 조선인에게 보인 남다른 태도는 일회적인 것이 아니었다.
오이시 씨는 후세 변호사가 "더 젊을 때는 '조선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한다'는 문서를 작성했다가 검사국에 불려가 조사를 받은 적도 있다"고 말했다.
후세 변호사는 이후에도 독립운동가 박열이 일왕 암살을 기도한 혐의로 기소된 사건, 김지섭 열사 등이 도쿄 왕궁 입구에 폭탄을 던진 사건 등 조선인의 변호를 반복해 맡았다.
또 간토(關東) 대지진 때 벌어진 조선인 학살 실태를 조사한 보고서를 펴냈고 1925년에는 조선에 큰 물난리가 났을 때 일본에서 의연 금품 모집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오이시 씨는 모금 운동 등이 "간토대지진 때 벌어진 학살에 대한 사죄의 의미를 담은 것으로 생각된다"고 고인의 심경을 헤아렸다.
조선인을 비롯해 사회적 약자를 옹호한 후세 변호사의 삶은 안락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이시 씨는 태평양 전쟁 말기 후세 변호사와 생활하던 시절에 관해 "당시 일본이 가장 미워하는 것은 미국이었기 때문에 후세 다쓰지를 모략하는 가장 효과적인 말은 '미국의 첩자'라는 것이었다. 나는 '미국 첩자 집의 아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감시와 비난으로 점철된 생활을 회고했다.
외조부가 한국과 맺은 인연이 그에게 적지 않은 속박을 안겼지만 오이시 씨는 광복 70주년이 다가오는 것에 대해 "한국이 독립한 것은 매우 기쁜 일"이라고 축하의 뜻을 밝혔다.
또 양국에서 정치 지도자가 국내 정치를 위해 상대국을 헐뜯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며 한일 관계의 개선을 위한 제언도 잊지 않았다. (취재보조: 이와이 리나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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