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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클로반<필리핀 레이테주>=연합뉴스) 태풍 '하이옌' 피해를 입었던 필리핀 레이테주 타클로반. 유니세프는 어린이들이 태풍으로 입은 트라우마 치료를 위해 축구 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축구 교실에 참여한 아동들의 모습.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제공) |
'하이옌' 끝났지만 방치된 거리 아이들…꾸준한 지원 필요
정부 행정력 한계 속 NGO들 분투…"트라우마 치유하도록 도울 것"
(타클로반<필리핀 레이테주>=연합뉴스) 설승은 기자 = 태풍 '하이옌'으로 심각한 피해를 본 필리핀 레이테 주 타클로반 일대는 꾸준한 재건 공사로 태풍의 상처에서 조금씩 회복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살 집을 찾지 못해 여전히 길 위에서 떠도는 어린이들은 가난과 성폭력, 약물중독 등 각종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었다.
정부의 행정력에 한계가 분명해 보이는 상황에서 비영리단체(NGO)들은 이들이 안전한 곳에서 정착해 적합한 교육을 받을 기회를 얻게 하려고 분투하고 있었다.
◇ 사각지대에 놓인 거리 아이들
"학교에 너무 가고 싶어요. 그림 그리기를 특히 좋아하는데 사실 아무 거나 배우는 건 다 좋아해요. 하지만 지금은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구걸해요. 저는 집도 없지만 꿈이 있어요. 멋진 제복을 입은 경찰관이 되는 꿈이요."
올해로 15살인 준준 군은 잘 먹지 못한 탓에 마치 8살이라고 해도 통할 만큼 키가 작고 왜소했다.
이달 23일 이곳의 재건 활동을 돕는 유니세프 관계자들과 함께 찾은 타클로반 빈민촌에는 준준 군처럼 집 없는 거리의 아이들이 모여 지내고 있었다.
원래 이곳에 살던 아이들도 있지만 하이옌 때문에 가족과 헤어져 이곳에 몸을 맡긴 아이들도 많다.
박스형 구둣방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나무 상자가 대여섯개씩 줄지어 서 있었고, 주변에는 아무렇게나 매인 줄에 옷가지들이 널려 있었다. 나무 상자는 아이들의 '집'이다.
뜨거운 공기 속에서 산더미처럼 쌓인 쓰레기들이 풍기는 악취가 콧속을 메케하게 찔렀다.
바닥에는 본드가 묻은 플라스틱병 조각들이 떨어져 있었다. 굶주리다 못한 거리의 아이들이 배고픔을 잊으려고 본드를 흡입한 흔적이라고 동행한 현지 가이드가 전했다.
아이들은 서로 가족 삼아 상자 안에 7∼10명씩 모여 산다. 너무 비좁아 더러는 길 위에서 자는 아이도 있다고 한다. 임신한 10대 소녀의 모습도 보였다.
유니세프 관계자는 "거리나 합숙시설 등 불특정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는 10대 임신이 심각한 문제"라며 "자신을 돌봐달라고 말할 사람도, 도움을 청할 곳도 마땅치 않은데 성교육 수준도 결코 높을 수 없다"고 말했다.
◇ 처참한 기억들…"하지만 딛고 일어서야죠"
그런데 거리 한쪽에서 갑자기 신나게 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30여명의 어린이들이 모여 그림을 그리다 말고는 주거니 받거니 랩과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유니세프 필리핀사무소가 거리의 아이들을 위해 정부와 손잡고 지난달부터 시작한 일종의 이동식 교실인 '우삽 타요'(Let's Talk·대화를 하자)가 열리고 있었다.
이는 태풍 피해 생존 어린이들의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프로그램의 일환이었다.
주로 항구나 시장 주변에 떠돌이 어린이들이 많이 모이는 곳을 찾아다니며 이들과 대화하고 상담을 한다.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거나 노래할 수 있는 장도 마련해준다.
이와 함께 유니세프는 지역사회와 함께 팀워크를 익히게 하는 취지의 축구교실 '풋볼 포 라이프'를 매일 운영한다. 전체 주에서 7개의 교실에 350명의 아동이 참여하고 있다.
유니세프의 아동보호담당자 페이 발래넌씨는 "아이들은 태풍으로 주변에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실종되는 엄청난 경험을 했다"며 "그때 입은 트라우마를 천천히 치유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고 말했다.
축구교실이 열리는 타클로반의 한 운동장을 찾았다. 이곳에서 만난 아동들은 웃음보를 터뜨리다가도 '하이옌'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면 표정이 금세 어두워졌고 심한 경우 울음도 터뜨렸다.
폴(14)군은 느릿한 말투로 "태풍이 왔을 때 1층에 있었는데 갑자기 물이 들어와 2층으로 도망갔었다"며 "창문이 깨지고 건물이 흔들리고 다들 겁에 질렸었다"고 회상했다.
모니카(14)양은 "태풍 때 가족이 흩어졌다 대피소에서 겨우 만났다"며 "너무 무서웠던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강하게 남아있다"고 전했다.
잠시 침묵하던 폴 군은 "그런데 여기서 친구들과 함께 운동하면서 행복함을 느끼고 있다"며 "코치님이 친구들을 잘 챙기고 뭔가를 배우는 느낌도 든다"고 말했다.
코치 패트리나 캐세레스(26)씨는 "나를 포함한 이 도시 사람들은 모두 하이옌으로 큰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라며 "함께 어울리면서 자연스럽게 우울함과 상처를 이겨내는 것을 배우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축구교실에 참여하는 학생들이 주로 차상위 계층이 많은데 평생을 빈민가에서 산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다"며 "매사에 올바른 태도를 보이면 축구나 공부, 일에서 성공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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