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제국의 완성자 쿠빌라이 칸의 통합 리더십

편집부 / 2015-07-28 11:48:14
모리스 로사비의 '수성의 전략가 쿠빌라이 칸' 출간

몽골제국의 완성자 쿠빌라이 칸의 통합 리더십

모리스 로사비의 '수성의 전략가 쿠빌라이 칸' 출간



(서울=연합뉴스) 임형두 기자 =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으나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다."

중국 전한(前漢)시대 초기의 유학자인 육가(陸賈)는 설파한다. 남의 땅을 정복하는 것보다 정복한 지역을 다스리는 게 더 어렵다는 뜻이다.

아시아와 유럽을 최초로 동시정복해 동서문명 교류의 다리를 놨던 칭기즈 칸(1162-1227). 그는 흩어진 몽골 부족을 통합해 세계사에 유례없는 대제국을 건설한 군사적·정치적 영웅이었다.

몽골제국 탄생과 확장은 고요한 초원에서 일어난 회오리바람이 어느 순간 거대 폭풍으로 돌변해 대륙을 뒤흔드는 것만큼이나 극적이다. 고작 100만명의 몽골인이 기껏 10만명의 군사력을 기반삼아 동서를 평정했다는 사실이 쉽게 믿어지지 않는다. 거기에는 물론 칭기즈 칸의 탁월한 리더십이 있었다.







하지만 그 대업을 잇는 수성의 후계자가 없었다면 몽골제국도 일과성 폭풍에 지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13세기 유럽인들이 '타타르의 공포'에 떨게 된 데는 칭기즈 칸의 믿음직한 후예들이 버티고 있었다는 뜻.

모리스 로사비의 저서 '수성의 전략가 쿠빌라이 칸'은 몽골제국이 그토록 장기간 존속하며 전세계를 호령했던 비결을 그 대표적 주역인 쿠빌라이 칸을 통해 살펴본다. 뉴욕 시티대학교 석좌교수인 저자는 미국의 저명한 동아시아·중앙아시아 전문가다.

통념과 달리 저자는 '몽골제국=칭기즈 칸'은 실제를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으로 본다. 칭기즈 칸이 유라시아를 '정복했다'는 데는 동의할지라도 유라시아를 '다스렸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는 얘기다.

몽골제국이 중국 전체를 100년 가까이 통치하고 북중국을 130여년 동안 다스렸던 데는 수성의 제왕이자 뛰어난 리더십의 보유자였던 쿠빌라이 칸이 있었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크게 보면 할아버지인 칭기즈 칸과 손자인 쿠빌라이 칸은 절묘하게 역사적 역할 분담을 했다. 칭기즈 칸이 세계를 정복했다면 쿠빌라이 칸은 제국을 통치했다. 할아버지가 확장한 제국 영토를 통합 리더십으로 안정화시킨 주역이 바로 그 손자였던 것이다.

쿠빌라이는 할아버지가 중국 북경(北京)을 함락시키던 해인 1215년에 태어난다. 하지만 칭기즈 칸의 넷째 아들인 톨루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출생 배경 때문에 처음부터 권력의 핵심으로 주목받진 못했다. 쿠빌라이에 앞서 칭기즈 칸의 둘째 아들 우구데이, 그 아들 구육, 톨루이의 맏아들 뭉케가 차례로 권좌에 오른다.

쿠빌라이의 뛰어난 통치감각은 인구 1만명의 작은 영지에서 발휘되기 시작한다. 그는 당시 칸이었던 삼촌 우구데이에게서 중국 하북지방에 속하는 형주(荊州)에 조그만 땅을 하사받는다.

쿠빌라이 가문은 우구데이 칸의 그늘에 가려 몽골제국을 이끌 가문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칸의 지위를 차지하고자 처음부터 야망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러면서 형주의 1만 백성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했으며 이를 기반으로 영역을 차근차근 넓혀갔다.







기다림과 포용, 소통과 통합의 리더십은 훗날 커다란 효과를 낳는다. 신위만사본(信爲萬事本·신용이 만사의 근본)이라는 말처럼 만백성의 신뢰를 얻고 난 뒤에는 어떤 장애도 쉽게 극복할 수 있었던 것. 이는 현대의 정치나 경영에서 그대로 유효하다.

쿠빌라이 칸은 자신과 다른 민족이거나 다른 종교를 가졌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차별하지 않았다. 통치에 도움이 된다면 출신과 무관하게 참모로 적극 기용했다. 그 결과 쿠빌라이 정부에는 몽골인뿐 아니라 중앙아시아인, 중국인, 위구르인, 티베트인 등 온갖 민족이 한데 모여 있었다.

이와 함께 신하의 의견을 적극 청취하는 열린 소통 시스템을 마련한다. 참모들에게 정책 제안서를 올리도록 하되 설사 채택되지 않거나 귀에 거슬릴지라도 처벌하지 않았다. 13세기에 이미 민족, 종교, 지역을 뛰어넘는 포용과 통합의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

이처럼 차별 없는 정책기조는 역대 최고의 경제부흥의 원동력이 됐다. 쿠빌라이는 중국의 전통 유교사상을 존중하면서도 상인과 무역, 장인과 의사 등 실용적 분야의 인재들을 등한시한 중국과 달리 이들의 가치를 높이 샀다. 이에 따라 각계각층이 차이와 차별을 뛰어넘어 통합됨으로써 더 큰 이익이 창출될 수 있었다.

쿠빌라이의 업적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거대 제국을 아우르는 사법 시스템을 만들고, 제국 문명의 기초가 되는 문자를 창안해낸다. 사회·경제·군사적으로 효율적인 체계 도입을 위해 고심했으며, 무역을 촉진키 위해 지폐 활용도 활성화한다. 나아가 교통과 통신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역참을 설계한다. '정복'이라는 한 번의 성공을 '수성'이라는 지속가능한 성공으로 발돋움시킨 것.

이처럼 저자는 쿠빌라이 칸이 역사상 최대 영토에 최신 통치 시스템을 창안해 적용한 문명의 설계자였다고 높이 평가한다. 상하, 좌우, 안팎이 소통하는 체제를 구축함으로써 할아버지가 세운 제국을 완성했다는 것이다. 뻗어나가던 몽골제국이 그가 죽은 1294년을 계기로 균열과 쇠퇴의 길을 걷게 된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2008년에 초판이 나온 이 평전은 내용을 보완해 이번에 개정판으로 다시 출간됐다.

강창훈 옮김. 사회평론. 480쪽. 1만8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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