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70년> 중국 타이항산에서 키운 '조국 독립의 꿈'

편집부 / 2015-07-27 07:00:04
산재한 유적이 끝까지 무장투쟁 벌인 조선의용대 기개 웅변
방치돼오던 무명 대원 묘소 독립기념관 도움으로 새 단장
△ 조선의용대 화북지역 최초 주둔지 (한단<중국>=연합뉴스) 고현실 기자 = 1941년 화북지방으로 올라온 조선의용대가 최초로 머문 중국 산시성(山西省) 상우춘(上武村)의 대형 사찰 터. 홍복사란 이름의 이 사찰은 당시 일본군의 공격에 불에 타버리고 지금은 절터만 남아있다. 2015.7.23 okko@yna.co.kr

<광복70년> 중국 타이항산에서 키운 '조국 독립의 꿈'

산재한 유적이 끝까지 무장투쟁 벌인 조선의용대 기개 웅변

방치돼오던 무명 대원 묘소 독립기념관 도움으로 새 단장



(한단<중국>=연합뉴스) 고현실 기자 = 중국의 타이항산(太行山)은 험준한 산세가 빚어내는 보기 드문 절경을 자랑해 '중국의 그랜드캐니언'으로 불린다.

허베이성(河北省)과 산시성(山西省) 사이 400㎞에 걸쳐 남북으로 뻗은 산맥은 예로부터 치열한 접전지이기도 했다. 중원(中原)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 춘추전국시대부터 곳곳에 군사 요새가 자리했고, 격렬한 전투가 이어졌다.

이곳에서 조국에 목숨을 바친 이들 가운데는 조선인도 있었다. 중국 공산당과 함께 항일전쟁의 최전선에 섰던 조선의용대가 그 주인공이다.

◇ '독립을 위해' 북으로 향한 조선의용대

지난 6월 말 조선의용대의 흔적을 찾아 허베이성(河北省)의 도시 한단(邯鄲)으로 향했다.

베이징에서 남서쪽으로 400㎞ 떨어진 한단은 화베이(華北) 평야에서 타이항산으로 접어드는 지점에 위치해 화베이 지역 교통의 요지로 알려졌다.

석탄이 풍부해 공업도시로도 유명한 이곳에서 서쪽으로 150㎞를 달리면 산시성(山西省)의 작은 시골 마을인 상우춘(上武村)이 나온다. 중국 대륙 남서부의 충칭(重慶) 본대를 떠난 조선의용대가 북으로 올라와 최초로 머물렀던 곳이다.

쭉 뻗은 고속도로가 끝나고 울퉁불퉁한 국도로 들어서자 왼편으로 날카롭게 솟은 타이항산의 봉우리가 펼쳐졌다. 산을 따라 이어진 풀밭 사이로 낡은 창고 건물들이 간간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 보이는 풀밭이 50여 년 전만 해도 모두 강이었습니다."

지금은 물의 흔적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마른 땅. 한때 '청장하'라는 큰 강의 지류가 흐르던 곳이었다는 현지 안내원의 설명이 믿기지 않았다.

이내 조선의용대가 이곳을 따라 주둔지를 마련한 이유가 짐작이 갔다. 뒤로는 병풍처럼 이어지는 봉우리들이 적으로부터 몸을 숨겨주고, 앞으로는 산을 감싸고 흐르는 강물이 장기간 전투를 위한 식수가 돼줬을 것이다.

독립 무장부대인 조선의용대는 의열단 단장이었던 김원봉이 중일전쟁 발발 이듬해인 1938년 10월 중국 정부의 임시수도인 허베이성(湖北省)의 한커우(漢口)에서 조직했다.

전투보다는 무장 선전에 주력한 의용대는 초기 병력이 200여 명에 불과했지만 1940년 초에는 300여 명까지 세를 불렸고, 중국의 항일 전쟁에 동참하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이들 중 일부가 1941년 봄 중국 공산당의 항일 근거지인 타이항산으로 향했다. 의용대 창설을 지원한 중국 국민당 정부와의 갈등이 커진 이유도 있었지만 만주와 한반도까지 진격해 조국을 되찾자는 게 이들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당시 최초 주둔지였던 상우춘에 당도한 병력은 80여 명. 이들은 이 지역의 대형 사찰인 홍복사(洪福寺)에 머물며 중국 공산당의 주력 부대인 팔로군(八路軍)의 지원 아래 전열을 가다듬었다.

같은 해 7월, 의용대원들은 현지에서 항일운동을 펼치던 화북조선청년연합회 회원 30여 명과 함께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창설해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의용대의 주둔을 알게 된 일본군이 공격해왔고, 근거지였던 홍복사는 모두 불에 타버렸다.

지금은 풀만 무성한 옛 절터 앞에는 지난 2002년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와 중국 지방정부가 함께 세운 '조선의용군 순국선열 전적비'가 쓸쓸히 손님을 맞고 있었다.

절터 뒤편으로 산길을 150m가량 올라가면 이름 없는 조선의용대원의 묘가 나온다. 2006년 독립기념관의 지원으로 번듯한 묘소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수십 년간 방치된 무덤이었다.

상우춘에 머무는 기간 조선의용대는 후자좡(胡家庄) 전투를 비롯한 격전을 치르며 많은 대원을 잃었다. 이 묘소의 주인공도 당시 전투로 희생된 대원 중 하나로 추정될 뿐 이름조차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마을 주민들은 해마다 추모제를 올리며 조국을 위해 타국에서 목숨을 마친 의용대원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 중국 시골에서 만난 70여 년 전 한글 구호

상우춘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자그마한 시골 마을인 윈터우디춘(雲頭低村)이 자리하고 있다. 상우춘을 떠난 조선의용대가 새로운 주둔지로 삼았던 곳이다.

상우춘에서 차를 몰아 윈터우디춘에 도착했을 때는 때마침 점심시간이었다. 마을 입구의 주민들은 집 밖으로 나와 저마다 밥그릇을 들고 식사에 한창이었다. 집에 냉방 시설이 제대로 돼 있지 않은 중국 시골에서는 흔한 풍경이란다.

마을 안으로 걸어 들어가자 마을의 대문 격인 남각(南閣)이 나타났다. 외벽에 눈에 익은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당시 의용대원들이 남긴 한글 구호였다.

"왜놈의 上官(상관)놈들을 쏴죽이고 총을 메고 조선의용군을 찾아오시오"

"조선말을 자유대로 쓰도록 요구하자"

동쪽과 서쪽 벽에 각각 쓰인 이 구호는 당시 일본군에 징병된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선전전의 결과물이었다. 한글로 써서 일본군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하면서 일본에 징집된 조선인 병사들의 애국심을 일깨우려 한 것.

하얀색 염료로 쓰인 구호는 반세기가 지나도록 예전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탐방에 함께한 상룽성(尙榮生) 조선의용군열사기념관장은 "한글 구호의 가치를 안 마을 교사들이 꾸준히 덧칠을 해서 비교적 예전 형태를 잘 유지하고 있다"며 "과거에는 이런 한글 구호가 곳곳에 있었지만 그동안 많이 소실돼 지금은 중국 전역에서 이곳만 남아 있다"고 전했다.

안타깝게도 햇볕을 많이 받은 남쪽 면의 표어는 희미해져 흔적만 남아 있었다.

마을 입구에는 조선의용군 사령관 김무정(1905∼1951)의 옛 거처가 있었다. 지붕이 무너질 위험이 있어 방문객의 출입은 불가능한 상태였다. 이곳도 세월에 씻겨 사라져간 한글 구호처럼 언제 없어질지 모르는 운명이었다.

◇ 일본군의 총탄에 사그라진 '북진의 꿈'

윈터우디춘에 머문 시기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큰 상처를 입었다. 1942년 5월부터 두 달 동안 일본군은 40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 타이항산 일대에서 대대적인 공격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지휘관이었던 윤세주와 진광화를 비롯해 대원 2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윈터우디촌에서 차로 15분 거리의 스원춘(石問村)은 윤세주와 진광화 열사의 유해가 모셔져 있던 곳이다.

두 열사의 묘소는 이곳에 있다 1950년 한단시에 국립묘소인 진지루위(晉冀魯豫) 열사릉원이 건립되면서 능원으로 이장됐다.

윤세주·진광화 열사의 옛 묘소는 연꽃을 닮은 연화산을 뒤로하고, 지금은 말라버린 청장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풍수의 문외한이 봐도 한눈에 알 수 있는 명당이었다.

묘를 관리하는 마을 주민 리슈잉(李秀英·50) 씨는 "두 열사가 묻히는 것을 현장에서 지켜본 시아버지로부터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며 "조선의용대가 좋은 묏자리를 찾아서 많이 돌아다녔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두 열사의 묘 사이에는 지린성(吉林省) 출신 조선의용대원의 유해가 묻혀 있다. 관건이라는 이름의 이 의용대원은 1984년 세상을 뜰 때 옛 동지들과 함께하고 싶다는 유언에 따라 이곳에 안장됐다.

관건의 사연은 당시 대대적으로 보도되며 중국 내에서 조선의용대에 대한 관심을 일깨우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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