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바이올린 저력 떨친 사제 김남윤-임지영
대관령국제음악제서 음악학교 교수, 연주자로 동반 참가
(평창=연합뉴스) 김정은 기자 = "수상은 기대도 안 했는데 그렇게 큰 상을 받아 얼떨떨했죠. 제게 큰 꿈을 꾸게 해준 김남윤 선생님이 여기까지 오는 데 가장 큰 힘이 됐습니다."(벨기에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바이올린 부문 한국인 최초 우승자 임지영)
"지영이는 기대를 안 했는지 몰라도 저는 기대를 했어요. 1등을 할 수 있을 거라는 감이 왔기 때문에 현장에서 지켜보는데 더 떨렸고, 그래서 더 감격했죠."(임지영의 스승 김남윤)
바이올리니스트 임지영(20)은 올해 한국 클래식계가 배출한 최고의 스타로 꼽힌다. 러시아 차이콥스키 콩쿠르, 폴란드 쇼팽 콩쿠르와 함께 '세계 3대 콩쿠르'로 불리는 벨기에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지난 5월 말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바이올린 부문 우승을 차지한 주인공이다.
한국 바이올린 연주자들의 세계적 수준의 기량과 저력을 다시 한번 떨친 이번 '사건'의 뒤에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임지영을 가르친 김남윤(66) 교수가 있다.
지난 2월 정년퇴임 후 한예종 한국예술영재교육원 원장으로 영재들을 키우고 있는 김 교수는 '바이올리니스트 황금 조련사'로 불린 미국 줄리아드 음악원의 고(故) 도로시 딜레이 교수와 비견할만한 교육자로 꼽힌다.
이경선·백주영 서울대 교수에서 권혁주, 신아라, 클라라 주미 강까지 숱한 연주자를 길러냈다.
두 달 전 세계 클래식계를 달궜던 김남윤과 임지영, 이 사제를 지난 23일 강원도 평창군 알펜시아 리조트에서 만났다. 이곳에서 열리는 제12회 대관령국제음악제에서 김 교수는 유망주들을 가르치는 음악학교 교수로, 임지영은 연주자로 참여한다.
콩쿠르 우승 후 한 달간 벨기에에서 14번의 연주회를 소화하고 귀국한 임지영은 한국에 와서도 전국에서 쇄도하는 연주 요청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번 대관령국제음악제에서는 사실 음악학교 '학생'으로 참가할 예정이었지만 콩쿠르 우승과 함께 많은 것이 달라졌다.
대관령국제음악제는 지난 2008년부터 작년까지 모두 7번이나 음악학교에 참가한 임지영을 축하하기 위해 음악제의 하이라이트인 '저명연주가 시리즈'의 23일 개막공연과 25일 공연에 특별무대를 마련했다. 여기서 임지영은 피아니스트 김다솔, 손열음과 각각 함께 연주한다.
"지금까지 배운 것을 쓸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라고 생각해요. 음악학교에 참여하면서 아주 어렸을 때부터 주미 강, 신지아 언니 등 선배들이 처음에 학생으로 참여했다가 연주자가 되는 과정을 옆에서 보고, 배울 수 있었어요. 저명한 아티스트들과 한 무대에 선다는 것이 저로선 큰 영광입니다."(임)
23일 피아니스트 김다솔과 함께 생상스의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 A단조'를 연주한 임지영은 섬세하면서도 힘있는 연주로 청중을 사로잡았다. 정명화, 정경화 공동 예술감독은 기립박수로 임지영의 앞날을 응원했다.
김남윤 교수가 제자의 강점으로 꼽은 '무대 장악력'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는 연주였다.
"'퀸 콩쿠르'는 그야말로 내로라하는 아이들의 집합소입니다. 하지만 우승자는 뭐가 달라도 다르죠. 지영이는 무대를 장악하는 힘이 있어요. 그것은 청중의 마음을 '팍' 하고 파고드는 것이에요. 연주를 잘하는 사람이야 수만 명이 있지만 이건 어려운 것이거든요. 아이들을 가르치다보면 참 잘하기는 하는데 무대에 가면 뭔가 불안한 경우가 있죠. 그건 결국 자기 컨트롤의 문제입니다. 심리적, 육체적으로 자신을 통제하는 것인데, 지영이에게는 그 어려운 것을 해내는 힘이 있습니다."(김)
"'퀸 콩쿠르'에 나오는 수준이면 기량은 종이 한장 차이에요. 그 사이에서 보여줄 수 있는 나만의 경쟁력이 뭐가 있을까 찾으려고 노력했어요. 그래서 내 음악의 '진정성'을 보여주려고 했죠. 보기에는 그럴싸해도 듣고 보면 와 닿는 것이 별로 없는 연주도 있거든요."(임)
결선에서 막상 무대에 오르자 긴장감은 사라지고 오히려 편안하게 연주했다는 제자와는 달리 이번 콩쿠르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김 교수는 어느 때보다 많이 떨었다. 규정상 제자에게는 점수를 줄 수 없게 돼 있어 임지영의 연주 때마다 심사위원이 아닌 스승으로 지켜봤다.
"브람스 연주 때 저도 모르게 다리를 덜덜 떨고 있었나봐요. 옆에 있던 심사위원 퐁타나로자가 제 다리를 눌러주면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어보이더군요. 사실 심사위원들끼리 서로 말은 안하지만 1차부터 반응이 굉장히 좋았어요. 아주 가까운 사람들은 조용히 축하해줬죠. 'Congratulation! She was fantastic!(축하해요. 그녀는 환상적이었어요!)'이라고요. 그런데 심사위원들의 취향이라는 것은 정말 예측할 수가 없어요. 저도 여러 콩쿠르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했지만 제 예상과 뒤바뀐 결과가 발표돼 충격을 받았던 경험이 있죠. 그래서 불안했죠. 하지만 지영이의 연주에 대한 신뢰는 있었어요. 지영이는 무대에서 자기 기량을 100% 발휘하거든요."(김)
임지영이 우승했을 때 예원, 예고, 한예종에서 공부한 순수 국내파라는 점도 이목을 끌었다.
하지만 김 교수는 "'순수 국내파'라는 말을 쓰는 것 자체가 이제는 촌스러운 얘기"라고 했다.
"저때만 해도 당연히 유학을 가야한다고 생각했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아요. 우리나라에 너무나 훌륭한 음악가와 선생님들이 많거든요. 그동안 좋은 선생님들이 많이 귀국했고 한예종 같은 전문교육기관이 생긴 덕분에 이런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해요. 저도 외국 유명 음악학교에서 마스터클래스를 많이 하는데, 한예종 학생들이 정말 잘한다는 것을 느껴요. 좋은 선생님들이 주말도 없이 열심히 가르치고, 아이들도 그 안에서 서로 열심히 하는 분위기가 큰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김)
임지영은 내년 초 대학 졸업 후에도 한예종 대학원에서 김 교수에게 2∼3년 정도 더 가르침을 받고, 이후 외국으로 나갈 생각이다.
"클래식 음악이 유럽에서 왔으니 그 지역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이야기하는지를 가까이서 보고 느껴보고 싶어요. 좀 더 큰 무대로 가기 위해 시야를 넓히려는 거죠."(임)
갑작스러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바쁜 연주 일정을 소화하는 제자에게 김 교수가 당부한 것이 하나 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단다. 항상 겸손해라."
제자도 스승의 말을 가슴에 새겼다.
"제가 큰 무대에서 우승했다고는 하지만 앞으로 배워나가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아직은 모든 것이 그저 새롭기만 합니다. 지금까지는 콩쿠르라는 확실한 목표가 있었는데 갑자기 달성되고 이제 막 새로운 스텝을 밟은 거잖아요. 선생님도 다 똑같이 겪어오신 과정이니 잘 이끌어주실 거라 믿어요. 잘 되겠죠.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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