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론·신학·인본주의·해체 넘어 이제는 사랑이다
프랑스 철학자 뤽 페리 '사랑에 관하여' 번역 출간
(서울=연합뉴스) 김중배 기자 = "정치가 원칙적으로 공익, 공공선을 추구한다면 힘을 모으고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무엇에 기대야 할까요? 국가주의나 혁명 사상에 기댈 수 있겠습니까? 절대 그럴 수 없다고 봐요. 그런 관념들은 이미 죽었거나 최소한 힘이 다 빠졌고, 그건 아주 잘된 일이죠."
프랑스 철학자 뤽 페리가 '사랑'을 새로운 철학적 원리의 기본으로 내세운 대담집 '사랑에 관하여'가 국내 번역 출간됐다.
뤽 페리는 프랑스 내에서 자크 데리다 이후 가장 주목받는 정치철학자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그가 내세우는 철학은 세속적 인본주의다. 2002년부터 2004년까지 자크 시라크 정부에서 교육부 장관도 지낸 현실참여형 학자다.
그는 그간 근대 담론의 중심이 돼온 우주론과 종교, 인본주의나 해체주의 같은 논의들이 더는 유효하지 않다고 역설한다. 대신 근대 가족의 변모를 이끈 '사랑'만이 그간 사회에 나타난 변화들을 설명할 수 있고, 새로운 가치 기준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커다란 목표들의 근거를 젊은이들의 미래를 걱정하는 마음에 둔다면, 가급적 그러한 관심을 가정에 뿌리내리게 하고 형평성을 다각도로 보장한다면, 한 나라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능히 그럴 만한 힘을 모을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사랑이라는 원리가 이제 가정들을 이끌어주기 때문에 증오, 이기심, 지상의 모든 폐해가 사라진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랑에 의지함으로써 공공선의 추구에 걸림돌이 되는 것을 뛰어넘을 수는 있을 겁니다."
그에 따르면 철학은 고대 우주론적 원리에 대한 탐구에서 중세 시대 신학적 원리, 근대에 들어서 인본주의,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 해체로 나아가는 지적 변용의 과정을 겪었다.
개별 사유는 각각의 시대적 요청에 맞는 답을 내놓았으며, 현재에서도 나름의 유효성을 갖추고 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진보의 개념을 인정하지 못한다 해도 각 시대의 철학적 사유가 일궈온 성과를 송두리째 부정해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특히 현대 프랑스 철학의 주류가 돼온 난해한 '해체'의 철학들에 대해 "욕조의 물을 버리면서 아기까지 버리는" 우를 범했다고 비판적 자세를 취했다.
그와 대담을 벌인 철학자 클로드 카플리에는 관념놀음으로 치부 받는 철학이 사실은 세상의 혁명적 변화를 이끌 단초가 될 수 있음에 주목한다. 르네 데카르트의 자아 관념, G.W.F. 헤겔의 '역사', 카를 마르크스가 내세운 '계급투쟁', 프리드리히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 개념이 각각 역사의 전환점에 미친 영향들이 그렇다.
철학이란 동시대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을 움직이는 무엇, 그러나 지금까지 누구도 포착하지 못했던 것을 개념화해 적절히 보여주는 것이다. 성공한 철학적 사유가 세상을 흔들어 그 어떤 물리력도 미칠 수 없는 저변의 변화를 이끌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카플리에는 "아직 자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다"는 단서를 달면서도 페리의 제안이 완전히 독창적이며, 데카르트와 같은 철학자들의 사유에 비교될만한 혁명이라고 평했다.
이세진 옮김. 은행나무. 260쪽. 1만3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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