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국 발전상 보셨으면 외증조부께서도 뿌듯하셨겠죠"
독립운동가 김만겸 선생 외증손자 맹게르만 씨 방한
(서울=연합뉴스) 신유리 기자 =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날아온 50대 남성은 충남 천안의 독립기념관에서 비로소 외증조할아버지와 만났다.
독립운동가 김만겸(1886∼1938) 선생의 외증손자인 맹게르만(51) 씨다.
수십 년 세월을 거슬러 독립기념관에 전시된 외증조부의 자료를 봤을 뿐인데도 맹 씨는 "뭔가 나와 연결돼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독립투사들이 목숨과 맞바꿔 이뤄낸 대한민국의 광복이 올해로 70주년을 맞았다.
그중에서도 김만겸 선생은 춥고 척박한 러시아 극동 연해주 땅에서 이역만리 조국의 독립을 위해 기꺼이 일생을 바친 대표적 독립운동가다.
그의 후손들은 러시아 국적으로 모스크바 등지에 살면서도 김만겸 선생의 투혼이 꺼지지 않도록 불씨를 지켜왔다.
맹 씨는 광복 70주년을 기념해 재외동포재단의 초청으로 지난 22일 한국을 찾아왔다.
그는 24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외증조부에서부터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의 나라에 오게 돼 기쁘다"고 소감을 밝혔다.
맹 씨는 함께 방한한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CIS의 독립운동가 후손, 고려인 동포 등 20여 명과 23일 천안 독립기념관, 망향의동산을 방문하고 서울 명동의 밤거리도 거닐었다.
특히 독립기념관에서는 어떤 기분을 느꼈을까.
"모국 사람들이 역사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후대에도 잘 전해주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전시 중에서도 정보기술(IT)을 활용해 영상을 보고, 관람객이 체험도 할 수 있어서 신기했죠. 한국인이 매우 창의적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무엇보다 큰 감명을 받은 건 외증조부인 김만겸 선생을 포함해 독립운동가들의 전시물을 만났을 때다.
"여태까지는 모스크바에서 어머니한테서 외증조할아버지에 관해 말로만 들어왔죠. 그런 얘기를 한국에 와서 직접 두 눈으로 보게 된 거예요. ㅗ이증조할아버지가 정말로 나와 연결돼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제가 그분의 후손이라는 게 실감이 났죠."
김만겸 선생은 1886년 블라디보스토크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조선인 소학교를 다니며 민족적 정체성을 키웠다.
1910년 조국이 일제에 강제 합병되자 연해주를 거점으로 항일 투쟁에 불을 지폈고, 한민학교 교사와 '청구신보' 편집인 등으로 계몽운동에도 힘썼다.
그는 하지만 1929년 소련 공산당에서 제명된 뒤 체포돼 옥고를 치르다가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1938년 순국했다.
"만약 외증조할아버지가 오늘날 한국에 와보셨다면요? 후손이긴 하지만 제가 말씀드리긴 조심스럽죠. 하지만 분명 조국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셨을 거예요. 한국이 이만큼 성장했고, 힘도 커졌다는 점을 보셨다면요. 당신께서 하신 노력이 이렇게 열매를 맺었구나 생각하시겠죠."
맹 씨는 모스크바에서 건설회사를 이끄는 경영인으로 자리 잡았다. 부친 맹동욱(78) 씨와 김만겸 선생의 손녀인 모친 맹타이야(80) 씨, 부인과 자녀까지 3대가 함께 산다.
외증조부에 대한 기억이 얼마나 남아 있을까.
"틈틈이 외증조할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나눠요. 저도 부모님으로부터 들은 선조 얘기를 딸들에게 빠짐없이 전해주려고 노력하죠. 하지만 세대가 흘러가면서 어쩔 수 없이 정보가 흐트러지잖아요. 아쉬운 마음이 크죠."
그는 갑자기 김만겸 선생에 대한 일화 하나를 기억 속에서 들춰냈다.
"어느 날 느닷없이 일본 사람들이 외증조할아버지 집으로 들이닥쳤대요. 평범한 하루였는데…. 그 순간 어떻게 하신 줄 아세요? 연약한 외증조할머니께서 갑자기 무슨 힘이 나셨는지 외증조할아버지를 2층 창문 밖으로 집어던지셨다네요.(웃음) 그러고 나서 외증조할머니와 아들인 제 외할아버지가 온 힘을 다해 문을 막아선 동안 외증조할아버지께서 가까스로 몸을 피하셨죠."
맹 씨는 웃음 지으며 들려준 옛날 얘기지만, 당시 연해주의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던 일제의 잔혹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일화이기도 하다.
실제로 일제는 1920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무고한 조선인을 대량 학살한 '4월 참변'으로 연해주 독립운동에 큰 타격을 입혔다.
맹 씨는 러시아에 사는 고려인 동포이자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서 한국에 어떤 점을 바랄까.
"사실 저희 고려인들은 한국에 오면 러시아 사람으로 취급받고, 러시아에서는 고려인으로 취급받거든요. 큰 문제죠. 그래도 러시아의 고려인이라 행복할 때가 많아요. 한국에 자주 올 수 있었으면 하고요. 한국이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성장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맹 씨는 26일까지 서울 경복궁, 용인 한국민속촌 등지에서 고국의 역사와 문화를 살펴보고 청계천, 63빌딩, 한강 유람선, 삼성 이노베이션뮤지엄 등을 둘러보며 한국의 발전상도 체험한다.
그는 "모스크바로 돌아가면 가족에게 해줄 얘기가 많을 것 같다"며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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