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65주년> 참전용사촌 세 노병 "한국 멋진 발전 여러분이 이룬것"

편집부 / 2015-06-23 06:43:18
워싱턴 D.C. '참전 용사촌' 인터뷰 "한국전 참전 자랑스러워, 해야할일 했을 뿐"
함흥 상륙작전후 중공군에 밀려 통한의 퇴각 회고, 역사적 휴전 전문 받아


<6·25 65주년> 참전용사촌 세 노병 "한국 멋진 발전 여러분이 이룬것"

워싱턴 D.C. '참전 용사촌' 인터뷰 "한국전 참전 자랑스러워, 해야할일 했을 뿐"

함흥 상륙작전후 중공군에 밀려 통한의 퇴각 회고, 역사적 휴전 전문 받아



(워싱턴=연합뉴스) 신지홍 심인성 특파원 = "우리는 가능성의 토대를 마련했을 뿐 한국의 멋진 발전은 여러분이 이룬 것입니다. 우리는 한국인 여러분이 자랑스럽습니다."

6.25 전쟁에 참전했던 옛 미군 용사 3명이 한 자리에 섰다. 전쟁 발발 65주년을 사흘 앞둔 22일(현지시간)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 북쪽 노스캐피털 스트리트 주변에 위치한 '참전 용사촌'(Armed Forces Retirement Home)의 1층 로비에서다.





이 용사촌은 미시시피 주(州) 걸프포트를 비롯해 미 전역 5개 시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다. 한국전과 베트남전, 이라크전 등에 참전한 용사 453명이 머물고 있다. 한국전 참전용사는 120명 정도다.

노년을 용사촌에서 보내고 있는 이들 3명을 이어준 끈은 한국전쟁. 노병들은 자신들을 찾아온 연합뉴스·연합뉴스 TV 취재진 앞에서 청춘의 한 자락을 바쳤던 지난 전쟁의 기억을 회고하면서 눈부신 한국의 발전상을 자랑스러워했다.

84세의 케네스 홀 씨는 해병대 병장이던 1950년 10월 한국전에 참전했다. 19세의 어린 나이었다.

그는 "1950년 포항에 선발대로 포항에 도착했다. 이어 상륙함을 타고 북한 함흥에 투입됐다"고 회고했다. 상륙작전에 나선 것이다. 부대는 일주일간 함흥에 머물렀다. 그의 임무는 장비의 하역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부대는 곧바로 통한의 퇴각을 해야 했다. 중공군이 참전 탓이다. 상사인 중령이 해변에서 짐을 부리고있는 그에게 다가와 "태울 수 있는 것은 모두 태워라. 중국이 참전했다"고 다급하게 말했다.

부대는 서둘러 함흥을 빠져나갔다. 행선지는 부산이었다. 그는 진해 등에서 복무하다가 1년 반을 한국에서 근무하고 귀국했다.

홀 씨는 "최근 미 의회에서 상영한 흥남철수를 다룬 영화 국제시장을 보았는가"라는 질문에 "아직 보지 못했다"며서도 "그러나 한국의 발전상을 오랜시간 지켜봤다. 한국을 잊지 않았다. 한국전 참전은 내 생애 가장 자랑스러운 일 중 하나이다. 나는 여러분이 이룬 일이 자랑스럽다"고 토로했다.

홀 씨는 다음 달 한국을 찾는다.



역시 84세의 리처드 로빈슨은 1952∼53년 한국전에 참전했다. 전투병은 아니었다. 당시 옛 서울대 캠퍼스에 자리한 미 8군 사령부에서 행정병으로 전쟁을 겪었다. 일본 요코하마 부대에서 총과 장비를 받아 사세보항을 거쳐 배를 타고 부산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이어 대구로 이동한 뒤 미 8군으로 가라는 명령을 그는 받아 서울에서 복무하게 됐다. 그는 "나는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매일 오전 10시 상부에 기밀 정보와 작전 보고서를 올렸다. 상부는 이것을 토대로 전투 계획을 세웠다"고 말했다.

또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판문점에서 온 전문이었다. 휴전이 될 것이라는 내용의 역사적 전문이었다. 그 날이 휴전 하루 전인 7월26일이었다"고 회고했다. 로빈슨은 다음 달 한국을 떠나 일본으로 갔다.

그는 "1967∼68년 한국을 다시가게 됐고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쓴 책을 한권 선물받았다"며 "한국이 어떻게 다시 태어났는지 보여주는 책이다. 그 책을 보고 너무 놀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국전에 참여한게 자랑스럽다. 한국전과 관련해 7개의 메달을 받았다. 한국인은 늘 우리에게 '희생했다'고 하며 우리가 한 일에 감사한다"며 "그러나 나는 별로 한 일이 없으며 그저 해야할 일을 한 것 뿐이다"라고 했다.

다만 실종된 전우들을 떠올리며 "적들이 그들을 어떻게 했는지 알 수 없다"며 "그 가족들이 안됐고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79세의 찰스 펠더 씨는 휴전 직후인 1954년 일병 계급을 달고 한국에서 복무했다. 미 정부는 1955년까지를 한국전 참전용사로 인정해줘 그 역시 이곳 용사촌에서 14년째 머물고 있다.

그는 임진강 북쪽과 DMZ의 중간지역에서 복무했다고 한다. 해병대 1사단 소속 무기 정비병이었다.

그는 2013년 휴전 60년을 맞아 한국 정부의 초대를 받아 방한했다면서 "아주 멋졌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얼마 전 국제시장 영화를 봤다며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졌을 때 나를 포함해 모든 사람이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라며 "영화 처음에 오빠가 여동생의 손을 놓치는 장면이 기억에 난다. 영화 마지막에 가면 여동생과 연락이 닿는다. 정말 굉장한 영화"라고 말했다.

그는 남북분단에 대해서도 "북한에 남은 가족과 다시 정말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남한에 있다.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했다.

또 한 사진을 꺼내 보여주며 "이 해를 기억하는가? 북한군에 의해 한국 배가 침몰하고 거의 모두 죽었다. 천안함이다. 그 배는 인양됐다. 거기에 갈 기회가 있었고 그 자리에 꽃을 놓았다. 그 자리에서 온 많은 사람들의 얼굴의 슬픔이 쏟아지는 것을 보았다. 영화와 같은 장면이었다"고 그는 토로했다.

펠더 씨는 한마디 하겠다고 청했다.

그는 "한국전이 처음 시작을 때 미국은 전쟁터로 갔고 나와 같은 군인이 필요했다. 우리는 요청에 응했다. 나중에야 미국이 무엇을 위해 싸웠고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친지 알게됐다"고 시작했다.

또 "내가 어떤 특정 전쟁에 뛰어든 것은 아니다. 미국이 가라는 곳으로 갔다. 어떤 일이 전쟁터에서 벌어지는지 목격했다. 전쟁이 끝나고 한국은 멋지게 발전했다. 돌이켜보면 "와우"라고 말할 수 있다"며 "한국전에 참전한게 자랑스럽다. 우리는 한국에 가능성을 부여했고 지금 한국을 일군 것은 여러분"이라고 말했다.

인터뷰가 끝난 뒤 로빈슨 씨는 자신의 숙소로 취재진을 이끌었다. 옆 건물 4층에 위치한 숙소는 1인용 방이었다. 화장실과 옷장, 침대, TV, 냉장고, 책상 등이 갖춰진 작은 방이었다. 10년 전 부인과 사별한 뒤 입주한 안식처다.

그는 이 방에서 '은퇴자 협회'가 제작한 다큐멘터리에서 자신을 인터뷰한 영상을 취재진에 보여주었다. 영상에서 로빈슨 씨는 "나는 부모를 13살, 16살에 잃고…군에 입대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 때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어 로빈슨 씨는 소중이 간직한 한국전 메달 7개를 꺼내 보여주었다. 그는 "이런 인터뷰에 응하는 것이 내 기쁨이고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그리고 "작성된 기사를 꼭 보내달라"고 거듭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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