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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 참전 '소년병' 류형석 씨 (서울=연합뉴스) 6·25 전쟁이 발발한 1950년 16세의 나이로 자원 입대해 북한군과 싸운 류형석(81·가운데) 씨. 사진은 지난해 7월 류 씨가 육군 관계자들과 인터뷰하는 모습. 2015.6.22 photo@yna.co.kr |
<6·25 65주년> ⑬16세 '소년병'이 겪은 참혹한 전쟁
(서울=연합뉴스) 이영재 기자 = "어린 나이였지만, 나는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을 직감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해 보였다."
경기도 용인에 사는 6·25 참전용사인 류형석(81) 씨는 22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전쟁이 터진지 한달쯤 지난 1950년 7월 말, 경북 구미의 정든 집을 떠나 피란길에 오르던 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당시 류 씨는 중학교 2학년, 16살의 소년이었다. '그래도 구미는 안전하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내려오자 류 씨 일가도 삶의 터전을 버리고 남쪽으로 떠나야 했다.
류 씨는 여섯 형제 중 넷째였다. 일제 시절 부친이 일본에서 청소부로 일하며 돈을 모은 덕에 집안 형편도 꽤 좋은 편이었고 가정도 유달리 화목했다. 그러나 전쟁으로 류 씨는 이 모든 것에 작별을 고해야 했다.
낙동강 방어전투가 한창이던 1950년 8월, 류 씨는 피난지인 경북 영천에서 자원 입대했다. 가족들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끓는 혈기에 무작정 자원 입대하던 또래들의 분위기에도 영향을 받았다.
그의 앳된 얼굴을 본 모병관이 "싸울 수 있겠나?"라고 묻자 류 씨는 "싸우겠습니다!"라고 힘껏 외쳤다.
이렇게 류 씨는 대구 훈련소에서 열흘 동안 사격과 수류탄 투척 같은 간단한 군사훈련을 거쳐 육군 1사단 11연대의 대대장 통신병이 됐다. 1사단장은 훗날 6·25 전쟁영웅으로 명성을 떨친 백선엽 장군이었다.
9월 중순을 넘어서자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했다는 소문이 돌더니 북한군의 전열이 급속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북진이 시작됐다. 류 씨도 부대와 함께 서울을 지나 10월 말에는 북한의 수도 평양에 입성했다.
평양은 곳곳에 북한군이 쳐놓은 바리케이드가 남아있는 어수선한 분위기였지만 류 씨는 대동강변 부벽루의 절경을 보며 잠시 감상에 젖는 여유도 누릴 수 있었다.
"그때는 '드디어 통일이구나' 하는 생각 밖에 없었지. 그런데 전세가 또 뒤집힐 줄이야…"
평양을 지나 평안북도 영변까지 진군했던 1사단은 중공군의 공세에 밀려 후퇴를 거듭했다.
전투보다도 힘든 것이 끝없는 행군이었다. 한참 후퇴할 때는 걸으면서 잠을 잤다. 앞뒤 동료들 사이에 끼어 잠결에 정신없이 걷고 또 걸었다. 잠에 빠진 동료가 비탈에 굴러 떨어져도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다들 비몽사몽이었다.
류 씨의 두 발은 물집이 터지고 고름이 엉겨붙어 양말을 벗을 수도 없을 정도였다.
보람있는 날도 있었다. 류 씨는 1951년 4월의 어느 날 대대장 통신병으로서 밤새도록 잠시도 쉬지 않고 예하 중대와 교신하며 한 명의 인명 피해도 없이 후퇴작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뿌듯하다.
먼동이 틀 무렵에야 작전을 끝낸 류 씨는 버려진 민가에 들어가 멀리서 울리는 중공군의 포격 소리를 들으며 단잠에 빠졌다.
백선엽 장군은 류 씨에게도 영웅이었다. 적과 마주한 최전선에 몸소 나와 대대장에게 "아가, 후퇴하지마라"라고 힘있게 말하던 백 장군의 모습을 류 씨는 잊지 못한다.
류 씨는 1952년 10월 대구에 있는 헌병학교에 들어가면서 전선을 떠났으며 전쟁이 끝난 1954년 4월 이등중사로 전역했다.
후방 근무 시절 겨우 휴가를 얻어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간 류 씨는 슬픈 소식에 접했다. 그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입대한 셋째 형이 1950년 10월 전사했고 1952년 입대한 둘째 형은 정전협정으로 총성이 멎기 직전인 1953년 7월 전사했다는 소식이었다.
둘째, 셋째 형수는 졸지에 청상과부가 돼 시집살이를 하고 있었다. 둘째 형수에게는 젖먹이도 한 명 있었다. 농사를 지을 일꾼이 없어 집안 형편도 말이 아니었다.
형들의 유해는 아직도 찾지 못해 국립서울현충원에 위패만 모셔둔 상태다.
6·25 전쟁 65주년을 맞는 류 씨의 소회를 물어봤다.
"해마다 6·25가 돌아오면 그저 쓸쓸하지. 때로는 처절하기까지 해."
우리 국민이 6·25 전쟁을 잊어버린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어 한없이 서글퍼진다는 것이다.
"얼마 전 러시아의 제2차 세계대전 전승 기념식을 TV로 봤는데 너무 부러웠다. 전쟁은 국가의 가장 큰 일 아닌가. 우리도 6·25 전쟁을 그렇게 기념해야 하는 것 아닌가."
전쟁이 요구한 고통과 희생의 의미를 되새기고 드높이는 것, 그것이 류 씨가 진정 바라는 일이라는 말로 받아들여졌다. 그것이야말로 류 씨와 같이 역사의 고통을 한 몸에 감내한 이들에 대한 보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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