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수교 50년> ⑤경쟁과 협력…불가분의 경제·인적교류

편집부 / 2015-06-15 06:30:09
반세기 동안 교역액 390배 증가…지원대상에서 경쟁자로
인적교류 비약적 확대…하루 평균 1만4천명 양국 왕래
△ <그래픽> 한일수교 50년 - 한·일 교역 추이 (서울=연합뉴스) 반종빈 기자 = 오는 22일로 한국과 일본이 국교를 정상화한지 50년이 되지만 일본은 우리에게 여전히 '가깝고도 먼 나라'다. 양국은 경제·안보 등을 중심으로는 협력해 왔으나 일본의 어긋난 과거사 인식과 독도 도발로 첨예한 갈등도 공존해 왔다.

<한일수교 50년> ⑤경쟁과 협력…불가분의 경제·인적교류

반세기 동안 교역액 390배 증가…지원대상에서 경쟁자로

인적교류 비약적 확대…하루 평균 1만4천명 양국 왕래



(서울=연합뉴스) 이웅 기자 =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후 반세기가 지났으나 양국 관계는 순탄한 행보만을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독도 영유권, 역사교과서 왜곡, 종군 위안부 등 풀리지 않는 역사적 앙금들 때문에 외교적 관계가 부침을 거듭하는 가운데도 경제 분야에서의 교류와 협력은 비약적으로 확대돼 왔다.

교역, 투자, 인적 교류 등 양적인 면에서의 성장뿐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괄목할 만한 발전이 있었다.

한일 수교 후 20∼30년 동안은 한국이 절대적 열세였던 기술과 자본을 일본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지원받는 의존적인 관계가 지속됐다.

이후 한국 경제가 성장을 거듭하면서 양국 경제 관계는 명실상부한 '경쟁과 협력'의 관계로 바뀌었다.



◇ 반세기 동안 한일 교역액 390배 증가

15일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한일협정을 맺은 1965년 수출 4천500만달러, 수입 1억7천500만달러로 총 2억2천만달러를 기록했던 한일 교역은 지난해 390배인 859억5천만달러로 늘었다. 매년 14%씩 꾸준히 성장한 셈이다.

일본은 중국, 미국에 이어 한국의 세 번째 무역 파트너이며 한국도 일본의 세 번째 교역 상대국으로 부상했다.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수출입은행 자료에 근거하면 일본의 대(對)한국 투자액은 지난해 24억9천만달러(352건)를 기록했으며, 한일협정 이후 지난해까지 누적 투자액은 379억8천만달러(1만3천85건)다.

반면 한국의 대일본 투자액은 지난해 5억8천만달러(449건)를 포함해 총 63억9천만달러(5천184건)를 기록하는데 그쳤다.

상호 의존적인 양국의 경제 관계는 사실상 1950년 한국전쟁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은 미군과 유엔군에 각종 전쟁물자와 서비스를 제공하고 5년간 총 16억달러의 '전쟁 특수'를 누린 것으로 추산된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패망한 일본이 단기간에 경제를 재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경제교류는 한일협정으로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5억달러(무상 3억달러·유상 2억달러)의 배상금을 받으면서 시작됐다.

당시 이 자금은 포항제철(현 포스코) 설립,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 경제 재건에 쓰였으며 이와 함께 일본의 설비와 기자재, 기술이 도입되기 시작했다.

포항제철은 일본 배상금(7천370만달러)과 일본수출입은행의 상업차관(5천만달러)에 일본 최대 철강회사인 신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의 기술 지원을 받아 1968년 창립됐다.

삼성은 1969년 일본 산요전기와 합작으로 삼성산요전기를 설립하면서 전자산업에 진출했다. 산요전기와 기술협약을 맺고 생산하기 시작한 흑백 TV가 발판이 됐다.

미쓰비시자동차는 현대자동차[005380]가 '포니 신화'를 쓰며 자동차 메이커로서 기초를 닦는 데 결정적인 원조자 역할을 했다.

1970년대 한국 산업계에는 일본에서 수입한 제조설비, 소재·부품을 사용해 만든 제품을 해외로 수출하는 가공무역이 자리를 잡았다.



◇ 기술·자본 지원대상에서 경쟁자로 전환

1980∼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한국의 일본 의존도가 높아졌고 양국간 교역이 확대될수록 대일 무역적자도 커졌다. 한국 정부는 만성적인 대일 무역적자를 해결하고자 사실상의 대일 수입규제조치인 수입 다변화 제도를 도입했다.

일본 기업들은 한국의 빠른 추격에 기술 이전을 기피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 경제는 전자, 자동차, 화학, 철강 등 전 분야에 걸친 산업의 발전과 함께 최고의 경제 호황을 누렸다. 그러다 1985년 '플라자 합의'로 엔화가치가 급상승하면서 발생했던 경제의 거품이 걷히면서 성장세가 꺾였다.

199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한일간의 기술 격차가 눈에 띄게 줄었다.

이어 2000년대 들어 양국 경제의 역학 관계에 본격적인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일본은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리는 장기 경기침체 속에 기업 경쟁력이 추락했다. 이에 반해 한국의 경우 기업들이 제품 경쟁력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면서 주력 산업에서 경쟁사들을 추월하기 시작했다.

삼성전자[005930]는 2006년 세계 가전시장에서 절대 강자로 군림해온 소니를 밀어내고 TV 시장 정상에 등극했다. 앞서 1993년 메모리반도체에서 일본 업체들을 따돌린 삼성전자는 휴대전화에서도 일본 경쟁사들을 제쳤다.

포항제철은 1998년 조강생산량에서 당시 세계 1위이던 신일본제철을 추월했다.

조선 산업에서는 현대중공업이, 디스플레이 산업에는 LG필립스LCD(현 LG디스플레이)가 일본과의 경쟁에서 앞서 나갔다.

한국은 세계 시장에서 일본의 최대 경쟁자로 부상했으며 일본은 한국 기업 극복 전략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최근 한일 양국 관계는 수교 이후 최악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각종 정치·사회적 악재들이 중첩된 결과다.

양국 교역도 갈수록 위축되고 있다. 한일 교역액은 2011년 역대 최대인 1천80억달러를 기록한 후 올해까지 4년째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대일 수출보다 수입이 더 빠르게 줄면서 무역 적자도 갈수록 줄고 있다.

한때 극복 과제였던 대일 무역의존도도 자연스레 약화되는 추세다. 대일 수입의존도는 1991년 25.9%에서 지난해 10.2%로 낮아졌으며 의존도가 높았던 소재·부품에서도 자동차부품 등 일부는 무역흑자로 돌아섰다.

이는 아베 내각의 금융완화 정책으로 고착화되고 있는 엔저(엔화 약세) 현상과 중국의 부상으로 인한 수입시장의 다변화와 맞물린 것으로 분석된다.



◇ 하루 평균 1만4천명 왕래…인적 교류도 확대

한국관광공사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을 방문한 일본인은 228만명, 일본을 방문한 한국인은 275만5천명으로 조사됐다. 한해 동안 총 503만5천명, 하루 평균 1만4천명이 양국을 오간 셈이다.

한일협정을 체결한 1965년 한국을 방문한 일본인이 5천95명에 그쳤던 데 비하면 비약적인 성장이다.

이같은 인적 교류 확대는 꾸준히 발전해온 경제 교류와 더불어 대중문화 개방, 한류 열풍으로 최근 10여년새 부쩍 활발해진 문화 교류가 배경이 됐다.

김대중 정부 때인 1998년부터 시작된 4차례의 개방으로 현재 방송 분야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일본 대중문화가 개방된 상태다.

일본에서는 2000년대부터 한국 영화·드라마·가요(K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특히 2004년 TV 드라마 '겨울연가'로 촉발한 '욘사마(배용준)' 열풍은 한국 문화를 낮춰보거나 무관심했던 일본 기성세대들의 태도를 바꾸는 계기가 됐다.

최근 한일 관계로 일본에서의 한류 붐이 지나갔다는 시각도 있지만 한류가 일과성 이벤트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로서 정착 단계에 들어갔다는 분석도 나온다.

양국 관계 경색이 장기화되면서 정치가 아닌 경제 분야에서 해법을 찾으려는 시도도 이뤄지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과 일본 경제단체인 게이단렌(經團連)은 정치적 상황과 별도로 경제 교류와 협력은 지속돼야 한다는 공감대 속에 2007년 이후 중단됐던 한일재계회의를 7년만인 작년 말 재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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