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우 설 자리 점점 좁아져 아쉽다…후배 위한 기록 남기고 싶어"
<인터뷰> 고은정 "이 시대 성우의 역할, 아직 남았다"
60~70년대 라디오 전성시대 이끈 '성우의 역사'…엄앵란·김지미의 목소리
"성우 설 자리 점점 좁아져 아쉽다…후배 위한 기록 남기고 싶어"
(서울=연합뉴스) 조민정 기자 = "성우는 오로지 목소리를 가지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창조하는 직업입니다. 소리를 듣고 상상을 하면서 자신의 정신세계에 근접할 수 있습니다. 물질이 지배하고 경제논리로 뒤덮인 세상이지만 그 끝에는 정신이 있으니 성우의 역할은 아직도 남아있다고 생각합니다."
'성우의 역사'로 불리는 고은정(79ㆍ여) 씨는 10일 한국성우협회 창립 50주년을 맞아 이뤄진 '성우들의 역사, 한국 라디오 드라마사'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뒤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1세대 성우로 1960~70년대 라디오 전성기를 이끌었던 고 씨는 성우의 설 자리가 점점 줄어드는 현실에 대해 "예전에는 푸른 초원에 살찐 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기분이었는데 어느 순간 메마른 광야에서 뿔뿔이 흩어져버려 외롭게 남아 있는 모습이 되어버렸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예전처럼 푸른 잔디 위에서 양들이 만나게 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면서 이번 책 발간을 준비했다"며 "유럽에서는 아직도 여러 형태로 성우들이 출연하는 라디오 드라마가 진행되는데 우리나라는 라디오 드라마, 성우의 역할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아 아쉽다"고 말했다.
함께 배석한 이근욱 한국성우협회 이사장은 "작년만 하더라도 KBS가 라디오 드라마 프로그램 하나를 폐지했고 성우들이 외화더빙을 하던 TV 명화극장도 없어졌다"며 "방송이 경제 논리로만 갈 것이 아니라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구색을 갖추는 데도 신경을 썼으면 좋겠다"고 거들었다. 이 이사장은 동아방송 성우 5기로 고은정 씨의 후배다.
고 씨는 1954년 KBS 성우 공채 1기로 입사해 '청실홍실' 등 인기의 라디오 드라마에 출연했고 엄앵란, 김지미 등 당대 최고 여배우들의 목소리를 연기했다.
지난해 성우 생활 60년을 맞은 고씨는 "처음 시작할 때부터 끝이 보이는 직업이라고 생각하며 두려워했는데 어찌 하다 보니 지금에 이르렀다"며 "성우가 애니메이션 더빙도 하고 텔레마케터도 하며 생업을 유지하는 정도의 직업이 됐는데 라디오 드라마가 부활해야 성우의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을 것 같다"며 라디오 드라마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고 씨는 "아직도 성우가 되고 싶어하는 지망생들이 많이 있지만, 성우 자체를 꿈꾸기보다는 다른 어떤 직업을 갖기 위한 징검다리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도 많고 단순히 호기심으로 하는 사람도 많다"며 "그래도 목소리만을 가지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만들어가는 그 순수한 만족과 희열을 느끼는 사람이 아직 있다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번 '라디오 드라마사'의 발간위원장을 맡아 아들인 윤태진 연세대 커뮤니케이션 대학원 교수와 함께 성우와 라디오 드라마의 역사를 정리했다.
입사 동기 10명 중 생존해 있는 7명이 모여 그간의 역사를 정리해보려 했던 것이 한국성우협회가 나서고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지원을 받게 되면서 한국의 라디오 드라마사를 정리하는 큰 프로젝트가 됐다.
"우리나라 라디오 전파의 역사가 90년인데 아무도 이걸 정리한 적이 없더라고요. 굉장히 힘든 작업이었지만 기억을 더듬어가며 즐겁게 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정말 죽을 힘을 다해서 열심히 자기 시대를 살았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우리 나이로 이미 80대에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왕성히 활동하는 그에게 꿈을 물었다.
"방대한 역사를 완벽하게 정리를 하려고 노심초사하며 힘들었는데 결국 내린 결론은 '욕심내지 말자'였어요. 하지만 내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라디오 드라마나 성우의 역사가 잊히기 전에 후배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책으로 묶어 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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