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만에 물러난 '세계 최장수' 사우디 외무장관

편집부 / 2015-05-01 05:33:00


40년만에 물러난 '세계 최장수' 사우디 외무장관







(두바이=연합뉴스) 강훈상 특파원 = 지난달 29일(현지시간) 전격 단행된 사우디아라비아 내각 개편에서 왕세제 교체만큼이나 세계의 이목을 끌었던 인물은 사우드 빈파이잘 알사우드 외무장관이었다.

1940년생인 그는 불과 35세였던 1975년 3월부터 무려 40년간 중동의 맹주 사우디의 외무장관을 지내다 이번 개각에서 바뀌었다.

공식적인 통계는 없지만 그가 세계 최장수 외무장관이라는 데엔 이견이 없다.

1월 즉위한 살만 국왕을 포함해 그가 외무장관으로 거친 사우디 국왕만 4명에 이른다.

이번 외무장관 교체를 둘러싸고 분석이 분분하지만 무엇보다 그의 나이와 건강 문제가 꼽힌다.

올해 75세인 그는 고질적인 허리 통증에 시달린 데다 올해 3월엔 보행 보조기에 의지해 걷는 사진이 보도되기도 했다.

사우디 사정에 정통한 한 인사는 "신경 계통에 문제가 생겨 최근엔 말까지 어눌해 졌다고 한다"며 "이미 몇 번 사의를 표명했다는 소문도 돌았다"고 전했다.

사우드 장관의 아버지는 사우디 3대 국왕인 파이잘(1964∼1975년) 국왕이다. 파이잘 국왕이 조카에게 피살돼 급사하지만 않았어도 사우드 장관은 유력한 왕위 계승자 후보 중 하나였다는 게 외교가의 평가다.

결과적으로 세계 외교가의 최장수 장관 기록 보유자가 됐지만, 그의 애초 전공은 외교 분야가 아니었다.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경제학 학사과정을 마친 뒤 귀국해 사우디 정부의 핵심부서인 석유부 차관까지 지내면서 후계자 수업을 받았다.

1975년 3월25일 파이잘 국왕의 피살 사건 뒤 왕위를 이어받은 4대 칼리드 국왕은 3월29일 그를 외교장관으로 임명했다.

외무장관 재임기간이 40년이나 되는 만큼 그는 중동의 대국 사우디의 외교 수장으로서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

1975∼1982년, 2006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과 내전, 1987년과 2000년 팔레스타인 인디파다(민중봉기), 1980∼1988년 이란-이라크 전쟁, 1990년 걸프전쟁과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등 중동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을 헤쳐나가야 했다.

사우디의 외교정책의 최종 결정권자는 물론 국왕이지만 그는 살만 국왕을 제외한 3명의 국왕의 신임을 받으면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친미 외교노선에 크게 어긋나지 않으면서 석유로 쌓은 부를 기반으로 한 사우디의 '조용한 외교'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숙적' 이란에 대해선 군사 행동보다 경제 제재로 대응했고, 레바논 내전 등 중동에서 벌어진 유혈충돌엔 중재자로 나섰다.

그렇지만 아랍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던 탓에 이스라엘 문제와 서방의 2003년 이라크 침공에 이은 사담 후세인 수니파 정권 퇴출을 놓고 미국 정부와 마찰을 빚기도 했다.

그는 2003년 BBC에 출연,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해 "이라크가 파괴돼 정권이 바뀌면 문제 하나는 풀리겠지만 다른 문제 5개가 새로 생길 것"이라고 불만을 표출했다.

후세인 정권이 붕괴되고 시아파 세력이 미국을 등에 업고 이라크를 장악하는 상황을 사우디는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서 2001년 9·11 테러범 19명중 15명이 사우디인으로 밝혀지면서 양국 관계가 경색되는 위기를 맞기도 했다.

2002년엔 이스라엘에 팔레스타인 정착촌에서 철수하는 것을 조건으로 아랍권 국가와 관계개선을 하자는 내용의 '아랍 플랜'을 제안했지만 이스라엘이 이를 거부하면서 무산됐다.

그는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을 이루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애석해 했으며 이와 관련해 2009년 뉴욕타임스와 인터뷰에서 "사람들은 내가 이룬 성공보다 실망감으로 나를 재단할 것"이라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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