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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레드' 출연하는 정보석 (서울=연합뉴스) 홍기원 기자 = 오는 5월 3일부터 31일까지 충무아트홀 중극장 블랙에서 공연되는 연극 '레드'에서 마크 로스코 역을 연기하는 배우 정보석이 23일 오후 서울 종로구 동숭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15.4.23 xanadu@yna.co.kr |
정보석 "30년 연기인생 가장 고통스런 역할"
연극 '레드'서 미국 추상표현주의 화가 '마크 로스코' 연기
(서울=연합뉴스) 김정은 기자 = "30년 연기인생에서 가장 두려운 역할이에요. 배우로서 이보다 힘든 역할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워요. 자다가도 벌떡벌떡 깨서 대사를 외우다가, '바보야, 이것을 왜 한다고 했단 말이냐' 하며 자학하죠."
천진한 바보에서 비열한 악당, 찌질한 천덕꾸러기까지 정극과 시트콤을 넘나들며 극과 극의 캐릭터를 자유자재로 소화하는 배우 정보석(53)이 한숨을 푹 쉬어가며 털어놓은 속내다.
TV 드라마와 영화, 연극 무대를 종횡무진하는 이 '연기파' 배우를 이토록 괴롭히는 역할이란 바로 내달 개막하는 연극 '레드'의 주인공이자 실존인물인 미국 추상표현주의 화가 '마크 로스코'다.
23일 서울 대학로 한 카페에서 만난 정보석은 "지금 제 머릿속에선 '내가 이 공연을 해낼 수 있을 것인가, 없을 것인가?'에 대한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2009년 영국 런던에서 초연한 '레드'는 이듬해 미국 브로드웨이에 상륙, 제64회 토니 어워즈에서 최우수 작품상과 연출상 등 주요 6개 부문을 휩쓴 작품이다.
마크 로스코가 1958년 뉴욕 유명 레스토랑에 걸릴 벽화를 의뢰받아 40여 점 연작을 완성했다가 갑자기 계약을 파기한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한다.
로스코와 가상의 인물인 조수 '켄'이 벌이는 논쟁만으로 극을 채우는 2인 극이다.
두 사람의 대화는 철학과 예술, 종교, 미술, 음악 등 인문학에 대한 현학적인 언어유희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이 논쟁의 본질은 로스코로 대표되는 구세대와 켄이 상징하는 신세대의 충돌이다.
한국에서는 2011년 연기파 배우 강신일, 강필석을 내세워 첫선을 보였다. 당시 평균 객석 점유율 84%를 기록했다. 2013년에는 뮤지컬 배우 한지상이 합류해 평균 객석 점유율 95%를 기록하며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냈다.
사실 정보석은 초연 당시 이 작품을 보고 강한 인상을 받아 제작자에게 먼저 "한번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제작자가 이를 기억하고 있다가 이번에 출연 제의를 한 것이었다.
"로스코가 후세대 화가들에게 밀려나고 거기에 분개하는 모습이 강렬하게 와 닿았어요. 저도 배우로서 구세대가 되기 싫으니까요."
'로스코'에 대한 공감과 함께 그를 반면교사로 삼아야겠다는 깨달음까지 얻었다.
수원여자대학 연기영상과 교수로서, 두 아이의 아버지로서 학생과 자녀들에게 엄격하기만 했던 자신을 되돌아본 계기가 된 것이다.
"제가 옳다고 생각해도 다른 세대에 강요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죠. 그들은 그 세대의 인생이 있으니까요."
이처럼 여러모로 그에겐 의미있는 작품이지만 막상 대본을 받고 들여다보니 '이건 아니다' 싶었다. 하지만, 드라마 촬영 등으로 바쁜 와중에 "적극적으로 거부 의사를 표하지 않은 사이" 그는 어느덧 연습실에 서 있었다.
"똑똑한 사람이 말까지 많아서 감당이 안 돼요. 특히 '선문답' 식이서 더 그렇죠. 현학적이고 관념적이어도 개연성이 있으면 고통스럽지 않은데 개연성이 없으니 생으로 외워야 하니까요. 인물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아야 하는데 그걸 찾기가 어려운 게 문제죠."
그는 "극 자체는 보고 즐기기 좋은 작품이고, 현란한 말들 속에 내 삶과 닿아서 탁탁 꽂히는 부분이 있어 해보고 싶었는데 착각이었다"며 "관객으로 보기엔 좋은 작품이지만 배우로서는 최악의 작품"이라고 말했다.
그는 3월 초부터 연습에 들어갔지만 지난 12일 종영한 드라마 '장밋빛 연인들'과 병행해야 해서 온전히 집중할 수는 없었다. 그 아쉬움 때문에 22일부터 성북동 자택에서 상대 배역인 '켄', 박정복과 합숙에 들어갔다.
2004년 연극 '아트'로 11년 만에 다시 무대로 돌아왔을 때 "겁이 나서" 동료 배우들과 합숙한 이후 11년 만에 처음이다.
"관객들이 말만 따라가다보면 연극의 본질을 다 놓칠 수 있어요. 내 귀에 닿는 말이 무엇인지 그저 편안하게 즐기시다 보면 인연이 있는 말이 다가올 겁니다."
그는 영화와 드라마로 바쁜 와중에도 이런 고통을 감내하며 꾸준히 연극무대에 오르는 이유를 "재미있어서"라고 설명했다.
"연습 과정은 고통스럽죠. 그런데 두 시간을 아무 생각 하지 않고 온전히 한 가지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해요. 그 순간 때문에 이 고통을 참는 거죠."(웃음)
1986년 드라마 '백마고지'로 데뷔한 그는 올해로 연기인생 30년을 맞는다.
"운이 좋게 지금까지 연기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고마울 뿐이죠. 초반에 연기를 못 해서 욕도 먹고 주인공에 뽑혔다가 쫓겨나기까지 한 것을 생각하면 정말 어마어마한 일이에요."
언제나 새로운 역할을 찾아나서는 데서 즐거움을 느낀다는 그에게도 마음속에 간직한 꿈의 역할이 있다. 그만의 셰익스피어 3부작의 세 주인공이다. '햄릿'과 '오셀로', '리어왕'.
2013년 연극 '햄릿'으로 첫 번째 꿈은 이뤘고 이제 두 작품이 남았다.
"이제는 오셀로를 한번 해보고 싶네요. 리어왕은 죽기 전까지 기회가 있으니까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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