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전쟁뒤 70년…아물지 않은 미·일 '증오의 기억'
(서울=연합뉴스) 권수현 기자 = '잔혹한 짐승 같은 광신도 일본인'과 '지옥불을 퍼붓는 코쟁이 괴물 미국인'.
태평양전쟁이 끝난지 70년을 맞는 현재 미국과 일본의 관계는 어느 때보다 우호적이지만 과거 이같은 증오심을 가득 채운 채 전쟁터에서 서로를 마주했던 이들의 상처는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있다.
AP통신은 21일(현지시간) 이오지마 전투 참전용사인 미국인 노먼 베이커(88)씨와 오키나와섬에서 여학생 의용대로 참전했던 시마부쿠로 요시코(87)씨의 사연을 통해 70년 전 전쟁의 참상을 되짚었다.
이들이 처음 '적'과 만난 것은 전쟁이 끝나가던 1945년이다.
미 해병4사단 소속으로 그해 2월 격전지 이오지마에 상륙한 베이커씨는 참호 안에 숨어 있던 일본인 병사를 발견하고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그는 "거리가 어찌나 가까웠던지 피가 나한테 다 튀었다"며 "우리는 일본인을 증오해야 한다고 세뇌당했고 잔인한 사고방식을 키웠다"고 회고했다.
시마부쿠로씨는 같은 해 3월 여학생 의용대에 들어가 동굴 안에서 부상자를 돌봤다. 미군의 폭격이 이어지는 가운데 마실 물조차 부족한 상황에서 군인들은 무기력하게 죽어갔고, 240명에 이르던 의용대 동료들도 절반 이상 숨졌다.
그는 그해 6월 해산 명령을 받고 동굴을 떠나게 되자 차라리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돌아봤다.
시마부쿠로씨는 "우리는 미국인을 짐승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우리와 완전히 다른 존재이고 붙잡히면 온갖 능욕을 당한다고 배웠다"면서 "포로가 되느니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다"고 말했다.
이들의 기억이 서로에 대한 적개심으로만 점철된 것은 아니었다.
베이커씨는 이오지마에서 전투 중 또다시 일본 군인과 코앞에서 마주쳤다.
일본 군인은 오른팔을 심하게 다친 상태였고 성한 왼손을 들어올려 저항의사가 없음을 드러냈다. 뒤에서 동료가 '빨리 죽여'라고 소리쳤지만 베이커씨는 총을 쏘는 대신 무장 해제를 확인하고 물과 담배를 준 뒤 포로로 보냈다.
베이커씨는 "그가 이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늘 알고 싶었다"고 말했다.
시마부쿠로씨에게도 '화해'의 순간은 찾아왔다. 동굴을 떠난 지 이틀째에 폭발물을 밟아 심하게 다친 그는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한 채 마을에 숨어있다가 미군에게 발견됐다.
그는 "혀를 깨물고 죽으려 했지만 기운이 없어 '죽여달라'고 빌었는데 그들이 구더기가 자라난 내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며 "일본군이라면 50명을 치료할 약한병을 나한테 다 썼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태평양전쟁 이후 이들은 비교적 평온한 삶을 살았지만 70년 전의 '증오'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베이커씨는 한국전에 참전한 뒤 항공우주공학자로 일했고 지난달에는 이오지마에서 열린 미일 합동 위령식에 참석했다.
베이커씨는 "일본인들의 잔인함과 비인간적인 면모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우리와 그들 사이에는 결코 좁혀지지 않는 문화적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시마부쿠로씨는 평생 교사로 일하다 몇주 전 마지막 수업을 했다.
그는 "포로로 잡혔을 당시에는 미국인들이 잘해줄 수록 더 미워했다"면서도 "미국인들을 증오하지는 않는다. 친절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 부자동네타임즈.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