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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과 해빙후 쿠바 첫 선거 (아바나 AP=연합뉴스) 쿠바 지도자인 피델 카스트로가 19일(현지시간) 쿠바 수도 아바나의 자택에서 지방선거 투표 준비를 하고 있다. 쿠바는 미국과의 관계에서 최근 역사적인 해빙 이후 첫 지방선거를 실시했다. Cuba's leader Fidel Castro prepares his vote for municipal elections at his house in Havana, Cuba, Sunday, April 19, 2015. Cuba held its first local elections, which allow direct voting for delegates to municipal assemblies that deal with local issues, since a historic thaw in relations with the United States with an unusual wrinkle in the single-party system: two of the 27,000 candidates openly oppose the government.(AP Photo/Alex Castro) |
"카스트로정권 전복 침공계획 CIA 협박에 보도 금지"
마이애미 헤럴드 전직 기자 증언, 국가안보 이유로
(서울=연합뉴스) 김선한 기자 = 미국이 1961년 4월 17일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 정권을 전복하기 위해 감행했다가 참담한 실패로 끝난 피그스만 침공 계획을 다룬 특종 기사가 중앙정보국(CIA)의 개입으로 보도되지 못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주인공은 당시 지방지인 마이애미 헤럴드 워싱턴 지국 소속 기자인 데이비드 크라슬로. 크라슬로 기자는 한 지인으로부터 피그스 만 침공 발생 7개월여 전인 1960년 9월 말에 충격적인 내용의 제보를 입수했다.
플로리다 주 마이애미 인근 홈스테드라는 지역의 한 이주 노동자 캠프에서 8월 26일 저녁에 총격 사건이 발생해 10대 청소년들이 중상을 당했으며, 출동한 경찰에 가해자들은 자신들이 카스트로 정권 전복을 위해 훈련 중인 쿠바 반혁명군이라고 주장했다는 내용이었다.
사건은 10대 청소년들이 캠프 담 넘으로 던진 폭죽이 폭발하자 캠프에 있던 쿠바인들이 달아나던 청소년들에게 기관총을 난사하면서 발생했다. 지역 경찰은 가해자들의 주장을 무시하고 15명을 체포해 일부를 살인 미수 혐의로 기소했다.
제보자는 크라슬로 기자에게 기소된 쿠바인들이 재판에 넘겨지지 않고 곧장 석방됐다면서 국무부에 이들의 정체와 캠프 설치 이유 등을 확인해달라고 요청했다.
크라슬로 기자는 사건의 성격을 고려해 국무부 대신 법무부을 상대로 취재에 나섰다. 취재 결과 CIA와 연방수사국(FBI)의 전설적인 에드가 후버 국장 간에 불화가 고조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CIA가 쿠바 망명자들을 훈련해 카스트로 정권 전복을 원했지만, FBI는 미 영토를 발진기지로 해 외국에 침공을 감행하는 것은 연방 중립법을 위반하는 불법행위라며 반대의 목소리를 낸 것이 불화의 핵심이었다.
끈질긴 취재 끝에 CIA가 쿠바인들을 규합해 카스트로 정권 전복을 위해 비밀리에 훈련을 받고 있으며, 일정한 시점에 대규모 군사 행동에 나설 것이라는 내용의 기사를 작성했다.
그러나 당시 마이애미 헤럴드의 간부진은 이에 불안감을 느꼈다. 사실이라고 해도 국가안보에 악영향을 끼친다면 보도를 하지 않는 것이 관례라는 판단에서였다.
간부진은 그에게 제임스 헤거티 백악관 공보비서관 등 정부 고위 관계자들과 접촉해 다양한 의견을 구해보라고 요구했다. 예상했던 것처럼 관계자들은 하나같이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하고 나섰다.
크라슬로는 마지막으로 앨런 덜레스 CIA 국장과 면담했다. 덜레스 국장은 이 자리에서 "당신이 그런 정보를 보도하면 결과적으로 국가안보를 심각하게 손상할 것"이라는 말만 늘어놓았다.
크라슬로는 덜레스가 골수 공화당원인 마이애미 헤럴드 사주에게 전화를 걸어 보도 금지를 요구했다고 주장했다. 사실상 협박이라고 주장한다. 이후 마이애미 헤럴드는 특종 기회를 얻었으면서도 이를 보도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 본토에서 군사훈련을 받던 쿠바인들은 과테말라로 캠프를 이동했으며, 이런 사실이 침공 3개월여 전에 뉴욕타임스(NYT) 등 일부 언론에 보도됐다. 그러나 NYT도 침공 준비 사실 등 핵심적인 내용을 뺀 채 보도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1천500여 명을 동원해 공격을 감행했지만, 100여 명이 사살되고 1천여 명이 체포되는 참패를 겪었다. 침공 실패 후 존 F. 케네디 당시 대통령은 NYT 기자에게 "이 작전을 좀 더 많이 보도했더라면 미국을 대재앙에서 구해냈을 것"이라며 아쉬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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