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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자와의 동침 15년'…노록수 선교사 (요하네스버그=연합뉴스) 류일형 특파원 = 남아프리카공화국 픽스버그에서 15년째 '에이즈 고아'들과 함께 살고 있는 노록수 선교사가 사택 거실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15.4.14 ryu625@yna.co.kr |
남아공서 '에이즈 고아' 돌보는 한인 선교사 부부
(요하네스버그=연합뉴스) 류일형 특파원 =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에 둘러싸인 작은 내륙국가 레소토와 국경을 마주하는 남아공 중부 픽스버그.
인구 1만 명가량의 작은 도시 주택가 한복판에 한국인 노록수·김은혜 선교사 부부가 15년째 운영하는 '엔젤스 홈(천사의 집)'이 있다.
이곳은 에이즈에 걸린 부모에게서 태어났으나 부모가 사망하거나 버려진 흑인 남녀 어린이 12명이 선교사 부부와 함께 생활하고 있다.
에이즈 부모에게서 난 아이들은 대략 절반 정도가 에이즈를 선천적으로 타고나 엔젤스 홈에 있는 12명 가운데서도 6명이 감염환자다.
13년 전 이곳에 온 흑인 남자 어린이 노음보(14). 돌이 갓 지난 아들을 업고 도둑질하다 체포된 음보의 생모는 픽스버그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던 중 아이를 버리고 도망을 쳤다.
2~3일간 음보를 데리고 있던 경찰은 엔젤스 홈을 찾아와 "애가 너무 울어 일을 할 수 없다. 엄마나 친척을 찾아 아이를 데려갈테니 1주일만 돌봐달라"며 음보를 맡겼다.
수투어로 선물이란 뜻의 '음포'란 이름밖에 모르는 음보에게 노 선교사는 음보라는 한국 이름을 지어주고 자신의 성을 따라 노음보라고 호적에 올렸다.
올해로 18세가 된 마뿌시(여)는 15년 전 생후 40개월에 에이즈로 부모를 잃고 자신도 에이즈에 감염된 채 어린이들 가운데 가장 먼저 엔젤스 홈에 왔다.
자신의 질병을 모른 채 자신을 노·김 선교사의 친딸로 알고 있던 마뿌시는 최근 돌봐주던 보모가 떠나면서 자신의 사연과 에이즈 감염 사실을 알게 되면서 한동안 정체성에 큰 혼란을 겪어야 했지만 지금은 상처를 잘 극복하고 있다.
10년 전 에이즈에 걸린 생모가 죽기 일주일 전 "내가 죽으면 돌봐달라"며 데려온 존(14)은 에이즈에 감염된 이곳 어린이들의 큰 희망이 됐다. 부모로부터 에이즈를 물려받아 치료를 받아오던 존이 2013년 정기검진에서 에이즈 바이러스가 완전히 없어진 것으로 진단됐기 때문.
치료하던 의사조차 믿을 수가 없어 몇 달 뒤 다시 검사를 했으나 더 이상 에이즈는 나타나지 않았다.
쾌활하고 붙임성이 좋은 존이 언제 어떻게 될까 늘 불안했던 노 선교사는 이제 "존을 보면 힘이 솟는다"며 존을 '기적의 아이'라 부르고 있다.
존은 에이즈로 고통받는 친구들에게 "꿈을 가져라"고 어른스럽게 말했다.
2000년 남아공에 둘러싸인 가난한 내륙국가 레소토 제1호 한인 선교사가 된 노 선교사는 레소토와 가까운 남아공 픽스버그로 이사한 뒤 레소토 수도 마세루에서 교회 개척을 하면서 에이즈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에이즈 환자가 대략 3천만 명으로 전 세계 에이즈 인구의 4분의 3이 몰려 '세계 에이즈의 화약고'로 불리는 남부 아프리카에서 에이즈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돌봐줄 곳이 없다는 한 젊은 여의사의 글을 지역 소식지에서 보고 바로 사택 창고를 개조, 아이들과의 동거를 시작한 것.
250만 인구 중 37% 정도가 에이즈 환자인 레소토는 실제 환자는 50% 이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에이즈 환자들과 사는 것이 위험하지 않으냐는 질문에 노 선교사는 "출생을 통한 수직 감염, 수혈, 성관계 3가지 경우 외에는 위험하지 않다. 아이가 다쳐 상처 난 부위에 약을 발라줄 일이 있을 땐 고무장갑을 낀다"고 말했다.
노 선교사는 "에이즈를 타고난 어린이의 경우 10살 이전에 사망할 확률이 50% 정도로 알려져 있으나 다행히 15년 동안 한 번도 가슴 아픈 일이 없었다"고 말하고 "아이들 때문에 '반 약사'가 된 아내 덕이 크다"며 약들이 빼곡히 쌓인 거실 서랍장을 열어 보였다.
6개월마다 시내 보건소에 가 피검사 등으로 상태를 체크 받는 어린이들은 약한 면역기능을 약으로 받쳐주지 않으면 바로 위험한 상태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매일 아침저녁 약을 챙겨줘야 한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우유 먹이랴 기저귀 갈아주랴 일이 많아 3명의 보모를 고용해야 했으나 이제 아이들이 자라 큰 애들은 동생들을 돌봐주고 자기들끼리 밥도 하고 빨래도 해 일손을 덜어준다고 대견해했다.
대신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의 인생상담 시간이 늘어나고 피아노 연습, 성경공부 등으로 부인이 더 바빠졌다.
노 선교사는 "학비와 생활비 등 비용이 만만치 않고 정부 지원도 전혀 없지만, 한국의 가난하고 어려운 분들이 작은 정성을 모아주어서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다"고 '개미군단'에게 감사를 표했다.
노 선교사는 "외로운 작은 자들의 엄마·아빠 역할을 맡은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라며 "에이즈로 부모 잃은 고아 100명을 키우는 것이 소원"이라고 식지 않은 열정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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