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함 5주년> ⑨'잊혀진 희생' 금양호 유족 '슬픈 5년'

편집부 / 2015-03-22 08:00:25
2년 걸려 간신히 의사자 지정…법원 "국가보상금 지급 의무 없다"
재단설립·추모공원 조성 무산…위령제도, 유족모임도 '흐지부지'


<천안함 5주년> ⑨'잊혀진 희생' 금양호 유족 '슬픈 5년'

2년 걸려 간신히 의사자 지정…법원 "국가보상금 지급 의무 없다"

재단설립·추모공원 조성 무산…위령제도, 유족모임도 '흐지부지'



(인천=연합뉴스) 손현규 기자 = 날개를 펼친 갈매기는 푸른 바다 위로 비상하려다가 말고 주저앉았다. 청동상의 갈매기가 내려앉은 7.5m 높이 위령비는 쓸쓸히 부두 광장을 지켰다.

22일 오전 98금양호 위령비가 서 있는 인천시 중구 항동 역무선 부두는 평온하다 못해 적막이 감돌았다. 5년 전 금양호가 침몰할 당시 높은 파도로 출렁인 대청도 앞바다를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지난 5년간 금양호 선원 9명의 희생은 세간의 기억에서 멀어져 갔다.

금양호 선원들은 당시 해양경찰의 요청을 받고 국가를 위해 천안함 침몰 현장으로 달려갔다.

천안함 침몰 이후 1주일이 지났을 무렵인 2010년 4월 2일.

군산 앞바다에 있던 100t급 저인망어선 금양호는 북한 어뢰에 피격되어 침몰한 천안함 선체수색 작업을 도와달라는 해경의 요청을 받았다.

뱃머리를 돌려 백령도 인근 천안함 침몰 해역을 코앞에 뒀을 무렵 대청도 남서쪽 해상에서 캄보디아 상선과 충돌했다. 금양호는 침몰했다.

선원 2명은 시신으로 발견됐고 나머지 7명은 실종돼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 희생자는 한국인 선원 7명과 인도네시아인 선원 2명이었다.



금양호 유족들은 고인의 명예를 찾고자 생업을 포기한 채 국가와 싸웠다.

의사자(義死者) 지정에만 2년의 세월이 걸렸다.

국가를 위해 일하다가 희생된 만큼 의사자 지정은 당연한 듯 보였지만 애초 정부는 뒷짐만 졌다. 이후 정치권이 나서자 상황이 나아졌다. 결국 보건복지부는 2012년 3월에야 이들을 의사자로 지정했다.

그러나 정부는 의사자 지정에 따른 국가 지원금은 지급하지 않았다.

다시 2년에 걸쳐 지루한 소송전이 진행됐다.

법원은 2012년 12월 금양호 선원 유가족 12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의사자 보상금 청구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당시 "금양호 희생자 유족들은 이미 의사자에 준하는 예우와 보상을 받은 것으로 봐야 한다"고 그 이유를 밝혔다.

유족들은 항소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민사가 아닌 행정소송으로 다뤄야 한다며 행정법원으로 사건을 넘기면서 두 번의 1심 판결이 내려졌다.

서울행정법원 행정6부는 지난해 4월 금양호 선원 유족 12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의사자보상금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유족들은 천안함 국민성금 중에서 희생자 1인당 2억5천만원의 보상금을 받음으로써 의사상자에 준하는 예우 및 보상을 받은 때에 해당한다"며 "정부는 의사자 보상금을 지급할 의무가 없다"고 판결했다.

이어 "의사자 보상금까지 받는다면 천안함 희생자 유족들과의 형평성 문제가 제기될 우려가 있다"고 덧붙였다. 사실상 민사 1심 재판부와 같은 판단을 한 것이다.

국가 보상금을 받지 못하게 되면서 재단 설립 후 희생자들의 이름으로 장학금을 마련해 어려운 학생들을 돕고 추모공원을 조성하려던 계획도 흐지부지됐다.

실종 선원 허석희씨의 작은아버지 용진(66)씨는 "나라에서도 (금양호 희생자들을) 예뻐라 하지 않는다"며 "소송을 하다가 소송비가 모자라 중단한 상태"라고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의사자로 지정됐지만 국립묘지인 대전현충원에 안장된 희생자는 정봉조씨 한 명뿐이다. 나머지 희생자들은 전과 등 결격 사유가 있어 국가보훈처 심의를 통과하지 못했다.

재단 설립 등 희생자 유족들을 한 데 묶는 매개체가 없다 보니 지난해부터 유족들끼리도 연락이 뜸해졌다.

2013년 농림수산식품부가 농림축산부로 개편된 뒤 수산 업무가 재신설된 해양수산부로 이관되면서 매년 해왔던 위령제도 흐지부지됐다.

이원상(51) 금양호 실종자 가족대책위원장은 "천안함 유족들에 비해 우리는 처음부터 소외받았다"며 "이제 큰 기대는 없다"고 고개를 가로 저었다

고 김재후씨 동생 재흥(46)씨는 "작년 기일(4월 2일)에 위령탑에 갔는데 혼자였다"며 "유족들이 부산과 대전 등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었지만 그래도 가끔 만나 서로 위로하고는 했는데 작년부터는 모임도 없어졌다"고 말했다.

그는 "올해도 위령탑에 가서 막걸리나 한 잔 뿌리고 올 생각"이라며 형 생각에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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