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백 "여우에 홀린듯 제정신 아닌 우리사회 그렸다"
서울시극단, 이강백 신작 '여우인간' 무대에
(서울=연합뉴스) 김정은 기자 =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살면서 모든 잘못을 '여우' 탓으로 돌리고, 자꾸 반복되는 과거에 사로잡혀 미래로 가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여우의 시선으로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1971년 등단 이후 수십 년간 줄곧 한국의 '오늘'을 이야기해온 극작가 이강백(68)이 새롭게 그린 우리의 자화상을 들고 돌아왔다. 오는 27일 개막하는 서울시극단의 연극 '여우인간'이다. 인간세상에 들어온 여우의 눈을 통해 이 시대 한국의 뒤틀린 현실을 꼬집는 우화극이다.
여우들이 바라본 지금의 한국 사회는 한마디로 제정신이 아니다. 모두 남 탓만 하고, 자신에 대한 반성은 없다. '뫼비우스의 띠'를 맴돌듯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며 미래로 나아가지 못한다.
이강백은 10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예술동에서 열린 제작발표회에서 그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이번 작품도 작가 자신의 경험에서 소재를 얻었다며 착상 배경을 설명했다.
"최근 몇 년 동안 제가 참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살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됐어요. 이미 예전에 저질렀던 실수를 계속 반복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내가 무엇인가에 홀려서 살기 때문에 자꾸 실수를 반복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주변을 보니까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분들도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무엇인가에 홀려서 실수를 반복하고 있더군요. 이것이 내 개인적인 현상이 아니라 아마도 사회적 현상이고,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문제가 아닌가 생각하게 됐죠."
그러고 보니 정말 "신기하게도" 기시감을 느끼게 하는 사건들이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있었다.
"도로에 구멍이 생겨서 사람도 빠지고 자동차도 빠지고, 배를 타고 바다를 지나가는데 바다에 싱크홀이 생기는 것처럼 빠지는 것을 우리가 봤잖아요. 그런데 이것은 한번 생겼던 것이 아니라 굉장히 여러 번 반복됐던 사건이죠."
그는 "그렇게 무엇인가에 홀려서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살면 '우리가 과거만 반복하고 있구나, 그래서 미래로 갈 수 없구나!' 하는 깊은 좌절감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도대체 우리 사회가 무엇에 홀렸는가 연구해봤더니 그게 여우였다"며 크게 웃었다.
작품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이 일었던 2008년부터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난해까지 지난 6년간의 한국을 담았다.
사냥꾼이 놓은 덫에 꼬리를 잘린 뒤 인간의 모습으로 서울에 온 여우 4마리가 정보요원, 사회변혁운동연합 대표의 비서, 오토바이 소매치기, 비정규직 청소부라는 각기 다른 신분으로 인간사회에서 살아가면서 겪는 다양한 사건사고와 인간군상들을 옴니버스식 구성으로 풀어놓는다.
인간들은 사고와 문제가 생길 때마다 여우들에게 홀렸기 때문이라고, 사회의 모든 혼란은 교활한 여우들의 음모 때문이라고 변명하며 그들의 잘못을 여우들의 탓으로 돌린다. 과거에서 현재로 왔다가, 다시 과거로 회귀하기를 반복한다.
연출을 맡은 김광보(51)는 여우들이 겪은 사건들을 우화, 놀이, 그림책 해설, 영상, 노래, 합창 등 다양한 틀에 담는다.
무대 위에 '세계'를 의미하는 단을 올려놓는 것 외에 특별한 무대장치는 없다. 배우들의 연기와 연극적 설정만으로 극을 끌어간다.
김 연출은 "각 에피소드들을 놀이처럼 풀었다"며 "마치 놀이와 놀이를 합쳐서 하나의 큰 공연이 이뤄지는 형식으로 만들어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강백 작가는 "매번 공연이 끝나고 나면 지금 우리를 이야기하는 작품을 쓰고 싶다는 갈급함 때문에 깊은 슬픔과 고통에 죽고 싶은 심정이 든다"며 이번 작품에도 "다급하게 목구멍까지 가득찬 말"을 담았다고 했다.
그는 보다 직접적인 사회비판이 아닌 우화 형식을 취한 데 대해 "작가는 전보문을 치는 사람이 아니다"라며 "작가는 그 시대를 형상화하면서도 그 시대가 지나가더라도 작품이 영원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작품이 시대와 지역에 얽매이지 않기를 모든 작가는 희구합니다. 적절한 시의성을 겨누면서도 그것의 상징성을 고민해야 하죠. 왜 단칼로 찌르지 않고 허공을 찌르듯이 하느냐 그러지만, 지금은 관객들이 작가보다도 더 뛰어나서 꼭 직구를 던지지 않아도 대개 작품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다 알아챕니다."
그는 퇴고를 많이 하기로도 유명하다. 이번 작품도 서울시극단에 넘기고 나서만 세 번을 고쳤고, 지금도 고치는 중이다.
"여러 번 많이 고친다고 좋은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화장할 때 수십번 고친다고 화장이 잘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요. 그런데도 그러는 것은 그저 버릇이죠. 고칠수록 좋아져서가 아니라 고치는 버릇이 제 병인가봅니다."
이강백의 희곡은 한국문학번역원에서 영어로 번역돼 나올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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