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카미야 아사히신문 전 주필 추모식, 한국에서 먼저 거행

동북아 국제관계에 평생 바친 일본 언론인<br />
4월28일 심포지엄 참석차 찾은 베이징에서 별세<br />
"3국 신문 제호로 동주(同舟)신문이 좋겠다"

편집부

news@bujadongne.com | 2016-06-20 23:37:14

△ 20160620_201603.jpg

(서울=포커스뉴스) '지한파' 와카미야 요시부미(若宮啓文) 아사히신문 전 주필의 추모식이 20일 오후 서울 광화문 S타워빌딩 다이아몬드홀에서 거행됐다.

지난 4월 29일 베이징(北京)의 한 호텔에서 숨진 채 발견된 와카야마 전 주필은 한중일 3국 심포지엄 참석차 지난 27일 서울에서 베이징으로 입국, 28일 호텔 욕실에서 쓰러진 채로 발견됐다. 중국 경찰은 외상은 없었으며 병사로 보인다고 밝혔다.

그가 작고한 지 한달이 지났지만 장례를 치렀는지 여부가 확인이 되지 않아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다양한 추측이 나돌았다. 그러나 이날 추모식을 통해 그동안 제기됐던 의혹 등이 해소됐다.

이날 추모식에 참석한 유족들에 따르면 와카미야 전 주필의 시신은 지난 5월14일 일본으로 돌아가 18일 도쿄의 한 가톨릭 성당에서 장례식을 치렀다.

이날 고인의 추모식은 도쿄가 아닌 서울에서 먼저 열려 관심을 끌었다. 한일관계 개선을 위해 그만큼 노력해 온 그의 업적을 한국 사회가 인정했다는 의미다. 일본에서의 추모식은 오는 7월 29일 도쿄서 열린다.

이날 박철희 서울대 일본연구소장 사회로 열린 추모식에는 고인의 아내와 두 아들, 이병기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 이사장, 김재호 동아일보사 사장,아시히신문 관계자 등 100명이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그의 빈자리를 아쉬워 했다. 박 소장은 "고인의 시신이 발견된 호텔 객실 탁상에 심포지엄 발제문이 놓여 있었다"고 밝혔다. 발제문에는 "한·중·일 3개국은 지구라는 바다에서 한 배를 탔다. 3국이 하나의 신문을 만든다면 제호를 '동주(同舟)신문'이라고 하고 싶다'고 적혀 있었다"고 박 소장은 전했다..


추모사는 평소 고인 인연이 깊었던 원로들과 벳쇼 고로 주한일본대사, 미야타 겐이치 아사히신문 전 부주간이 맡았다.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 이사장은 고인을 '저스티스 메이커'라고 칭하며 "한국과 일본 양국의 정의가 무엇인지 모색한 언론인이었다"고 말했다. 유명환 한일포럼 회장은 "8월 개최되는 한일포럼에서 그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질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벳쇼 대사는 "과거 자신이 외무성 한국 담당 과장을 할 때 한국과 일본이 경쟁이 아니라 협력할 수 있는 관계를 알려준 이가 바로 그"라고 말했다.

미야타 전 부주간은 고인이 한국의 독도 영유권을 인정하자고 주장한 사설을 작성할 당시 일화를 소개했다. 미야타 전 부주간은 "고인이 '차라리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포기하고 독도를 우정의 섬으로 삼자'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어 진행된 좌담회에서도 고인의 업적을 기렸다. 박 소장은 고인은 보수우파와의 전면전을 마다치 않은 '작은 거인'이라고 말했다. 심규선 동아일보 논설위원은 "고인은 낭만적 칼럼니스트, 스타일 로맨티시스트였다"고 회상했다.

하코다 아사히신문 논설위원은 고인은 "유연한 머리로 뾰족하게. 어떤 심각한 상황에도 여유 있게를 강조했다"고 기억했다.

지난 1970년부터 2013년까지 아사히신문사에 재직했던 그는 언론계를 떠난 이후에도 일본 국제교류센터 시니어펠로우, 동서대 석좌교수 등을 맡아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해 왔다.와카미야 요시부미 아사히신문 전 주필의 추모식이 20일 서울 광화문 S타워빌딩 다이아몬드홀에서 진행됐다.손성배 기자 와카미야 아사히신문 전 주필의 추모식에서 정구종(왼쪽) 동서대 석좌교수의 사회로 좌담회가 진행됐다.손성배 기자 와카미야 요시부미 전 아사히신문 주필 추모회에 참석한 그의 아내 리에코(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 씨와 내빈.손성배 기자

[ⓒ 부자동네타임즈.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WEEKLY H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