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탉의 '범죄'에 암탉이 외친다!…그녀들의 '필리버스터'
정치행위에서 일반시민 연설·토론방식으로 확대 <br />
강남 살인 사건 도화선 돼 연단에 선 여성들
편집부
news@bujadongne.com | 2016-05-26 16:45:36
△ 강남역 살인사건 추모 공간, 서울시청 시민청 이전
(서울=포커스뉴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했다. 새날이 밝았다고 우렁차게 울어야 할 수탉이 제구실을 못하고,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뜻이다.
여성은 그저 정숙하게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이 속담에 여성들이 반기를 들었다. 여성들의 '필리버스터' 열풍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수탉이 제구실을 못하면서 암탉이 "안전하고 건강한 세상"을 소리높여 외치고 있다.
법안의 통과·의결을 막기 위해 국회에서 오랜 시간 발언을 이어가는 것을 뜻했던 필리버스터가 연설·토론의 방식으로 자신의 솔직한 이야기를 나눈다는 의미로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특히 여성들이 '연단'에 서기 시작했다. 지난 17일 오전 1시20분 서울 서초구 강남역 인근 노래방 화장실에서 여성을 잔인하게 살해한 사건이 일어난 이후 생긴 현상이다.
연단에 선 여성들은 사회의 치부를 하나 둘 까발리기 시작했다.
◆ 강남역 '묻지마 살인'이 촉발
한국여성민우회는 지난 20일 오후 5시부터 21일 오전 1시까지 7시간여동안 서울 서대문구 창천동 유플렉스 앞에서 '여성폭력 중단을 위한 필리버스터'를 주최했다.
이날 50여명의 여성들이 길거리에서 발언을 자청했다. 당시 필리버스터에 참여했던 여성들이 했던 말들은 한국여성민우회 공식 홈페이지에 기록됐다.
"안타까운 것은 여성혐오라고 이야기를 하면, 본인을 공격하는 말로 받아들여요. 왜 그럴까요? 육아 문제를 얘길 하면, 그걸 공감하고 해결하기보다는 남성들도 힘들다고 해요. 남성들에게 짐을 지우는 것은 결국 본인이에요. 같이 살아요. 남성분들, 제발 페미니스트가 되세요."
"보호는 불평등한 관계를 전제로 가능합니다. 내가 더 강하기 때문에 약한 여성을 보호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보호할 가치 있는 여성과 그렇지 못한 여성으로 나눕니다. 여성을 때려야 할 이유는 넘쳐 나지만 남성은 그렇습니까? 살인자는 말했습니다. 여성들이 나를 무시해서 죽였다고. 만일 우리가 누군가를 동등한 대상으로 본다면, 그 사람이 나를 무시했다고 때리고 죽이고 혐오할 수 있을까요"
이는 당시 필리버스터에 참여했던 여성들의 발언 일부를 홈페이지에서 발췌한 것이다.
여성들은 남성들에게 페미니스트가 되라고 이야기 하기도 하고, 사회에 만연한 성차별 문제에 대한 지적을 서슴없이 쏟아냈다.
지난 19일 오후 8시, 강남역 10번 출구에서도 작은 연설 공간이 마련됐다. 강남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으로 희생된 여성을 추모하는 자리였지만, 여성들은 일상생활에서 겪었던 이야기들도 언급했다.
이들은 최근 자유발언대 장소를 서초동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서울 마포구 동교동 홍대입구역 9번 출구로 바꿨다.
추모쪽지는 철거됐지만 "한국사회의 뿌리 깊은 여성혐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행동들을 진행하고자 한다"는 취지에서다.
◆ 온라인으로 이어진 필리버스터 '신드롬'
이러한 열풍은 온라인으로 옮겨왔다. 오프라인의 시공간 제약을 벗어난 온라인에서는 지금도 많은 여성들의 이야기가 기록되고 있다.
강남역 10번출구 페이스북 페이지 '강남역 10번출구 자유발언대'를 통해서다. 이 페이지는 현재 1161명이 좋아요를 눌렀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페이스북 페이지 강남역 10번출구 자유발언대는 성별을 불구하고 자신이 겪었던 다양한 이야기들이 올라오지만, 주로 여성들의 이야기가 올라온다.
서초동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마련됐던 자유발언대에서 나눴던 이야기들이 정리돼 올라오기도 하고 페이스북 메시지를 통해 제보된 이야기도 있다. 주제는 '한국에서 여성으로 태어난 사람들이 겪는 아주 일상적인 이야기'다.
"저는 20대 여성이고 대학교를 다니고 있습니다. 매번 듣기만 하다가, 저도 짧게 나마 얘기를 하고 싶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중략) 사건 이후 주말에 친구가 자취방에 놀러 왔는데, 밥을 먹고 싶어서 찬장을 뒤지는데 밥이 없었어요. 친구에게 햇반을 사와야 한다고 말하니, '밤도 늦었는데 무서워서 못가겠다'고 말을 했어요. 무엇이 저와 친구를 무섭게 만들었나요. '이 사건의 피해자가 내가 될 수도 있겠다'는 의식 속에 자리 잡은 공포 때문 아니었을까요."
"새벽 2시쯤에 메가박스 앞 건물 가게 앞에 서있는데, 30대 남성이 말을 걸었어요. (중략)자기랑 얘기 좀 하자고 그 건물 노래방으로 끌고 가는 거에요. 끌고 가더니, 자기가 용돈을 줄테니 한번만 해달라고 말했어요. 저 너무 무서워서 뒤도 안보고 도망쳤어요. 옆에서 발언 듣고 있는데, 진짜 여자라면 이런 일 다들 한번씩 겪는구나.... 슬프네요 진짜."
페이스북 페이지 강남역 10번출구 자유발언대에는 위 같은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올라온다. 다. 익명을 전제로 운영되는 페이스북 페이지 강남역 10번출구 자유발언대는 여성들의 자유로운 '발언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 "여성 인권 신장과 연결된 현상"
여성들이 겪었던 일들을 가감 없이 쏟아내는 현상에 대해 전문가들은 이례적이라고 분석한다. 사회적 위상이 높아진 여성들이 자기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최원진 한국여성민우회 활동가는 "필리버스터를 진행하면 여성들의 성폭력·성희롱 이야기 뿐만 아니라 자기가 살아오면서 규제 받고 불안에 떨었던 이야기들도 나온다"며 "여성들이 집단으로 나와 이야기 하기 시작한 도화선은 강남 살인 사건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여성들은 이번 살인 사건을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로 느껴 공포심을 갖고 있다"며 "즉 남 일과 같지 않게 느끼는 것이다"고 덧붙였다.
최 활동가는 또 "여성의 인권 신장과도 연결이 된다"며 "주로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여성이 80년생인데, 이들은 자신의 언어를 가지고 남성과 동등하다는 것을 교육 받고 자란 세대다"고 언급했다.강남역 인근 주점 화장실 살인사건 피해자 추모 공간이 옮겨진 서울시청 시민청에서 24일 오전 시민들이 추모글귀를 살펴보고 있다. 2016.05.24 오장환 기자 지난 20일 한국여성민우회가 '여성폭력 중단을 위한 필리버스터'를 주최했다. 강남역 인근 주점 화장실 살인사건 피해자 추모 공간이 옮겨진 서울시청 시민청에서 24일 오전 한 시민이 추모 글귀를 적고 있다. 2016.05.24 오장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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