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2016…한반도 북핵 위기 결정적 장면 '탑 10'

1994년 '김일성-카터 회담'부터 2016년 UN안보리 '4차 북핵' 제재결의까지

편집부

news@bujadongne.com | 2016-05-03 06:00:47

△ 북핵09-20160106_4차_핵실험-수소폭탄_실험_성공_주장_545.jpg

(서울=포커스뉴스) 북한의 7차 노동당 대회가 다가오면서 북한이 실제 5차 핵실험을 감행할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제4차 핵실험에 따른 유엔 안보리의 '대북제재 결의 2270호' 채택에 이르기까지 '북핵 위기 결정적 10 장면'을 모았다.

#1. 김일성·카터 회담…1차 북핵 위기의 극적 봉합


1985년 12월12일 북한은 핵확산방지조약(NPT)에 가입했다. 그러나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특별사찰에 반발해 1993년 3월12일 NPT탈퇴를 선언했다.

1994년 3월17일 김영삼 대통령이 'NHK'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제재 필요" 발언을 하자 북한은 "서울 불바다"로 맞받았다. 한반도는 전쟁 위기상황으로 치달았다. 5월13일 북한이 영변에서 사용한 연료봉을 꺼내기 시작하면서 '1차 북핵 위기'가 본격화됐다.

미국의 영변 핵시설 정밀타격 가능성까지 제기되던 1994년 6월,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CNN' 기자와 함께 전격 방북, 김일성 주석을 만났다. 두 사람은 핵개발 동결과 핵사찰 원상복귀에 전격 합의했다.이는 1994년 10월21일 '제네바 합의' 도출로 이어졌다.

#2. 북한의 핵무기 보유 선언…6자 회담으로도 멈추지 않는 2차 북핵 위기



그러나 2001년 미국 뉴욕을 강타한 9·11테러는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를 보수화시켰다.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시선도 변화했고 그 결과 '2차 북핵 위기'가 시작됐다.

'2차 북핵 위기'는 2002년 10월3일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의 특사 방북, 미국의 중유지원 중단, 북한의 12월12일 핵 동결 해제 및 핵시설 가동 선언, 2003년 1월10일 북한 NPT 탈퇴 등으로 꼬리를 물며 이어졌다.

이에 북한의 핵문제 해결을 위한 '6자 회담'(한국·북한·미국·일본·중국·러시아)이 2003년 8월27~29일 중국 북경에서 처음으로 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2003년 10월2일 외무성 대변인 담화로 재처리가 완료돼 추출된 플루토늄을 핵 억제력 강화의 용도로 전환할 것임을 선언했다. 이후 2005년 2월10일 북한은 외무성 성명을 통해 "자위를 위해 핵무기를 만들었다"고 선언했다.

#3. '9·19 공동성명'…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 가능성


2005년 9월 중국 베이징에서 개최된 제4차 6자회담 2단계 회의에서 북핵 폐기 및 이행 원칙을 담은 '9·19 공동성명'이 채택됐다. 이는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 가능성이 보여주는 결정적 장면으로 각인됐다.

그러나 거의 동일한 시점에 미국 재무부가 방코델타아시아(BDA)은행이 20년간 북한이 위조한 달러와 마약거래 대량살상무기 거래 등으로 벌어들인 돈을 세탁해줬다면서 미국 금융기관과의 거래를 금지했다.

이 조치로 북한자금 2천4백만 달러가 BDA은행에 묶이게 되자 북한은 반발했고 6자회담은 표류하기 시작했다.

#4. 1차 핵실험과 유엔안보리 대북제재 결의…끝없는 쳇바퀴


BDA은행 문제로 9·19 공동성명 이행이 지지부진하자 북한은 2006년 7월5일 미사일 발사에 이어 2006년 10월9일 1차 핵실험을 단행했다.

이에 2006년 10월14일 유엔안보리는 '대북제재 결의 제1718호'를 채택했다.

#5. 영변 원자로 냉각탑 폭파…'2·13 합의'로 다시 찾아온 평화 무드


2007년 2월 제5차 6자회담 3단계 회의 결과 13일 '9·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초기 조치'(2·13 합의)가 채택됐다. 5개국은 북한이 핵시설을 불능화할 경우 중유 100만 톤을 지원하기로 했다. 미국은 테러지원국 해제 및 대적성국 교역법 적용 종료를 진전시키기로 했다.

2007년 10월 제6차 6자회담 2단계 회의 결과 북한은 2007년 말까지 모든 핵 프로그램 신고를 완료하기로 합의하고 핵기술 이전 금지를 약속했다.

북한은 주요시설 3곳(영변 5㎿ 원자로, 방사화학실험실, 핵 연료봉 제조 공장)을 폐쇄했다. 2008년 6월27일 북한은 상징적인 의미로 영변 원자로의 냉각탑을 폭파했다.

#6. 6자 수석대표 회의 합의 도출 실패…2차 핵실험 강행과 유엔 제재 악순환



2008년 12월8일~11일 중국 베이징에서 6자 수석대표 회의가 개최됐다. 그러나 북한이 시료채취를 거부함으로써 합의 도출에는 실패했다.

북한은 2009년 5월25일 2차 핵실험을 강행했다. 이에 대해 유엔안보리는 동년 6월12일 '대북제재 결의 제1874호'를 채택했다.

#7. 김정일 영결식, 김정은 시대의 개막…헌법 개정, 핵보유국 명시



김정일이 2011년 12월17일 급성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북한은 이를 극비에 부쳤다가 12월19일 정오에 공식발표했다. 이때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이던 김정이 군 최고사령관으로 진급하고 서열 1위인 장의위원장으로 추대됐다.

이후 전면에 등장한 김정은은 대내결속 및 자신의 정당성 강화를 위해 2012년 4월13일 헌법을 개정했다. 김정은은 개정헌법 서문에 핵보유국임을 명시했다.

비핵화 협상을 전제로 안전보장을 담보 받고자 했던 김정일의 시대에서 핵무기 보유를 통해 미국으로부터 안보를 확보하겠다는 이른바 '선 확산, 후 협상' 전략의 김정은 시대가 열린 것이다.

#8. 당 중앙위 전원회의…'핵·경제 병진 노선' 채택


김정은은 2013년 2월12일 3차 핵실험을 강행했다. 이에 유엔 안보리는 동년 3월8일 북한의 금융 거래를 일부 금지하는 '대북제재 결의 제2094호'를 채택했다.

김정은은 이에 맞서 3월31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소집하고 '핵·경제 병진 노선'을 채택했다. 이는 '한반도 비핵화가 김일성의 유훈'이라는 입장을 손자인 김정은이 폐기한 것으로 북핵이 그만큼 난해한 국면으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9. 4차 핵실험…차원이 다른 핵무기 첫 '수소탄' 주장


'핵·경제 병진노선' 채택 이후 북한은 "핵 억제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새로운 형태의 핵실험도 배제되지 않을 것"이라며 제4차 핵실험 가능성을 꾸준히 시사했다.

결국 2016년 1월6일 제4차 핵실험을 실시했다. 북한은 이를 첫 수소탄이라고 주장했다.

#10. 케리·왕이 합의…유래없이 강력한 대북제재 채택, 북한의 고립 심화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과 왕이 중국 외교부장은 2016년 2월23일(워싱턴 현지시간) 회담 후 공동기자회견을 열고 "대북 제재 결의안과 관련해 중대한 진전이 있었다"고 발표했다.

미국과 중국이 합의함에 따라 3월2일 유엔 안보리에서 금융거래 및 선박 입항 금지 등을 골자로 하는 '대북제재 결의 2270호'가 통과됐다.북한은 2016년 1월6일 제4차 핵실험을 실시했다. 이에 유엔 안보리는 금융거래 및 선박 입항 금지 등을 골자로 하는 '대북제재 결의 2270호'를 3월2일 채택했다. 2016.03.02. ⓒPhoto by Albin Lohr-Jones/Pacific Press/LightRocket via Getty Images)미국의 영변 핵시설 정밀타격 가능성까지 제기되던 상황이던 1994년 6월15일,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CNN 기자와 함께 전격 방북, 김일성 주석을 만났다. 두 사람은 핵개발 동결과 핵사찰 원상복귀에 전격 합의했다. 이는 1994년 10월21일 '제네바 합의' 도출로 이어졌다. 1994.06.15. ⓒ카터센터북한은 2005년 2월10일 외무성 성명을 통해 "자위를 위해 핵무기를 만들었다"고 선언했다. 2005.02.10. 2005년 9월 중국 베이징에서 개최된 제4차 6자회담 2단계 회의에서 북핵 폐기 및 이행 원칙을 담은 '9·19 공동성명'이 채택됐다. 2005.09.19. ⓒPhoto by Claro Cortes-Pool/Getty Images북한이 2006년 10월9일 제1차 핵실험을 단행했다. 이에 2006년 10월14일 유엔안보리는 '대북제재 결의 제1718호'를 채택했다. 2006.10.15. 2007년 '2·13 합의'가 채택됐다. 북한은 2007년 말까지 모든 핵 프로그램 신고를 완료하기로 합의했다. 북한은 2008년 6월27일 북한은 상징적인 의미로 영변 원자로의 냉각탑을 폭파했다. 사진은 폭파장면. 2008.06.27. 2008년 12월11일 중국 베이징에서 6자회담이 열렸으나 합의 도출에 실패했다. 이에 북한은 2009년 5월25일 2차 핵실험을 강행했다. 2008.12.11. ⓒPhoto by Elizabeth Dalziel-Pool/Getty Images2011년 12월 김정일이 사망했다.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이던 김정이 군 최고사령관으로 진급하고 장의위원장으로 추대되면서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2011.12.30. 김정은은 2013년 2월12일 제3차 핵실험을 강행한 뒤 3월31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소집, '핵·경제 병진노선'을 채택했다. 2013.03.31. 북한은 2016년 1월6일 제4차 핵실험을 실시한 뒤 이를 첫 수소탄이라고 주장했다. 2016.01.06.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과 왕이 중국 외교부장은 2016년 2월23일(워싱턴 현지시간) 공동기자회견을 열고 "대북 제재 결의안과 관련해 중대한 진전이 있었다"고 발표했다. 2016.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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