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망각과 치유]⑩ 조선왕조실록, 역사가 기록한 '침몰사고'
태종 "책임은 내게 있다(責乃在予)"<br />
정조 "무리하게 운항하다 침몰하면 엄히 처벌하라"
편집부
news@bujadongne.com | 2016-04-17 08:00:04
△ 경건한 마음으로
(서울=포커스뉴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지 2년.
사람은 과거에서 현재를 보고 역사에서 미래를 본다고 한다.
역사의 기록을 살펴봐도 당장 오늘의 기사로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조선왕조실록에서 침몰사고를 살펴본다.
◆ "책임은 내게 있다(責乃在予)"
1403년(태종3년) 5월 5일, 경상도의 조운선(세금 수송선) 34척이 침몰해 천여명이 숨졌다는 보고를 듣자 태종이 꺼낸 첫 마디다.
태종실록 5권에는 '임금이 사고 소식을 듣고 탄식하기를 "책임은 내게 있다…바람이 심한 것을 알면서 배를 출발시켰으니 이것은 실로 백성을 몰아서 사지(死地)로 나가게 한 것이다"라고 기록돼있다.
조선은 쌀과 포를 통해 조세를 징수한 농업국가다.
그런 이유로 세금을 운반하는 조운선이 침몰한다는 것은 곧 나라 곳간에 직접적인 타격을 입는다는 의미다.
그러나 태종은 쌀보다 사람을 챙겼다.
태종은 "쌀은 비록 만 석을 잃었어도 아까울 것이 없지만 사람 죽은 것이 대단히 불쌍하다"며 "그 부모와 처자의 마음이 어떠하겠는가"라고 백성을 가엽게 여겼다.
태종의 이러한 마음 씀씀이는 지난해 12월 열린 공개 청문회장에서 목포 해경 승조원이 한 말과 대비된다.
"(배에 타고 있던) 아이들이 철이 없어 위험을 감지하지 못했다"
◆ "배에 물건을 적재함에 있어서 한도를 넘기지 말라"
1731년(영조7년) 7월 4일의 일이다.
여러 도(道)에서 배가 파손돼 사람이 빠져죽고 물건이 가라앉은 상황이 계속해 들려오니 영조는 실태를 파악해 보고하도록 했다.
신하들이 알아보니 지방에서 수도의 고관대작에게 공물을 바치는데 이를 과적하는 바람에 배가 쓰러졌던 것.
영조는 "공물의 운송이 비록 중요하지만 사람의 목숨에 비하면 도리어 경미한 것이다"라고 탄식하며 "뱃사람들이 장차 물고기 뱃속에 장사지내게 될 터이니 마치 나 자신이 아픈 듯하다"라고 슬퍼했다.
이어 배에 물건을 싣는데 있어 한도를 넘기는 폐단을 경계하도록 했다.
무리한 화물의 적재는 조선시대에도 해양사고의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조선시대 법전인 '경국대전'의 속전에는 세금 운반선에 화물을 과적하면 선주와 선장, 승무원 등까지 엄벌하도록 법제화돼 있었다.
세월호 침몰의 주된 원인이 '화물 과적 및 적재화물 관리 부실'인 점을 보면 여전히 갈 길이 요원해 보인다.
◆ "무리하게 운항하다 배가 침몰하면 엄히 처벌하라"
조선시대에는 해양사고에 엄격한 처벌을 가했다.
1777년(정조1년) 3월 8일, 강원도에서 세금을 실은 배가 침몰하자 정조는 "물에 빠져 죽은 인명이 수천에 이르고 침몰된 곡물도 수천 포가 넘는다. 내가 딱하고 마음이 아파 차라리 죽어 몰랐으면 싶다"고 통탄했다.
이후 신하에게 침몰 원인이 배의 정비가 부실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진노해 "임무를 맡은 자가 잘 점검하지 못한 죄를 면할 수 없다"며 경상도·강원도 감사(현 도지사급)에 죄를 물었다.
또 며칠 후인 3월 17일 "운항에 알맞은 바람을 기다리지 않고 재촉하여 출발해 배가 침몰하는 경우에는 해당 수령을 법전에 의하여 엄히 처벌하라"고 남겼다.
영조도 1767년(영조43년) 6월 19일, 호남의 곡물 수송선이 침몰하자 "각 배의 선장에게 머뭇거리고 지체했던 죄로 한 차례 형벌을 주고 귀양을 보내라"하고 전남 영광의 전 군수 이흥종을 위도로 귀양보냈다.
무리한 운항, 정비의 부실. 2년전 세월호 참사 당시 하루가 멀다하고 지적된 내용들이다.
그러나 오늘날 대한민국의 처벌은 엄하지 않았다.
전해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해 4월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세월호 참사와 관련 감사원이 징계를 요구한 공직자 34명 가운데 10명만 중징계(파면 1명, 해임 2명)를 받았다.
경징계는 15명, 나머지는 경고처분을 받거나 인사이동 등으로 징계를 피했다.
결국 감사원이 지목한 해양수산부, 해양경찰청, 인천지방해양항만청, 한국선급 등 소속 34명 중 29명은 여전히 공직에 있다.
◆ "배의 침몰은 사고가 아닌 인재(人災)다"
조선 말기인 고종 재위 시절에는 유독 부패한 관리가 세금 운반선을 고의로 침몰시키는 일이 많았다.
배를 고의로 쓰러뜨리고 실려있던 곡물과 면포를 훔치고는 '풍랑이 심해 쌀과 재목을 건져내지 못했다'고 거짓 보고를 하는 것이다.
1865년(고종2년) 9월 15일, 선혜청(현 국세청)에서 조운선이 침몰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는데 그 내용이 흥미롭다.
"충청 공주에서 선혜청에 바친 쌀 1203석을 실은 배 1척이 침몰됐으나 거의 두 달이 되도록 한 포의 곡식과 한 조각의 재목도 건져내지 못했다"
이어 "침몰된 경위를 살펴보니 쌀을 실어 놓고 날짜를 지연시킨 것과 감독관이 병으로 타지 않았다는 것부터가 대단히 의심스러우며 담당관리들이 계책을 짰다는 소문이 있다"고 보고했다.
이에 대해 고종은 "이 보고를 보니 허다하게 제기한 의문점들을 통해서 고의적으로 침몰시킨 실상을 알 수 있다"며 진노하며 "해당 감영에서 철저히 다시 조사해 진상을 밝히라"고 명했다.
그러나 이후 고종4년 '선혜청에서 덕산군의 대동선이 침몰한 것과 관련된 자를 벌하도록 아뢰다', 고종18년 '선혜청에서 조선의 파선에 대한 문제로 아뢰다' 등 부패한 관료에 의한 고의 침몰 사고는 계속됐다.
◆ 우리는 제대로 하고 있는가
1794년(정조18년)의 사고 기록을 보면 사건에 대한 조사결과가 매우 소상하다.
"적재량이 쌀 1만1195석, 콩 1851석, 잡비 1543석, 구조량이 쌀 9252석, 콩 876석. 인명피해 격군(노잡이) 익사 1명…사고원인은 적재량이 과다하여 출발을 지체하다가 빨리 운항할 의도로…"
현대의 사고 기록과 견줘도 손색이 없을만한 수준이다.
조선시대의 해난사고는 왕에게까지 보고되는 국가적으로 중대한 사건이었다.
때문에 조사와 기록이 철저하고 보고체계도 확실했다.
영조 재위기간 기록(영조실록 109권, 1796년 6월 19일 2번째 기사)을 보면 왕이 보고에 의문이 들면 어사를 파견해 추가로 조사하고 관련자를 처벌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2014년 참사 당시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직접 방문한 대통령의 발언이 대중에 회자되며 논란이 됐었다.
"구명조끼를 입고 있었다는데 그렇게 구조하기가 어렵습니까"
현재의 질문에 조선왕조실록은 이렇게 답변할 것이다.
"책임은 내게 있다(責乃在予)"(태종3년 5월 5일)서울 종로구 사직단에서 나라의 평안과 풍년을 기원하는 '사직대제'가 봉행되고 있다. 강진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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