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말하고 싶어? 모두 대나무숲으로 모여"
'○○대학교 대나무숲'…대학생들, 자주 찾는 소통공간 '부상'<br />
자발적으로 만든 그들만의 페이지…철저한 익명보장 '눈길'<br />
개인적인 고민부터, 부조리에 대한 고민까지…소통 활발
편집부
news@bujadongne.com | 2016-03-09 16:06:46
△ 청년실업 삽화
(서울=포커스뉴스) 신라시대 경문왕의 두건을 만드는 복두장(幞頭匠)은 경문왕의 귀가 당나귀처럼 길다는 사실을 자신만 알고 있었다.
복두장은 이 '1급 비밀'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다가 적막한 도림사 대나무숲에 홀로 들어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크게 외쳤다.
그 뒤 바람이 불 때마다 대나무숲에서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소리가 들렸다.
이는 '삼국유사'에 전해지는 '여이설화'(驪耳說話)다.
유일하게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는 장소를 상징하는 '대나무숲'이 2016년에도 생겼다.
대나무숲을 이용하는 주체는 대학생이고 장소는 페이스북(사회관계망서비스·SNS)이다.
◆ 대학생들의 속 시원한 소통창구 된 '○○대학교 대나무숲'
대학생들의 소통방식이 변하고 있다. 학생들은 대자보를 쓰기 위해 들어야 했던 하얀 전지와 펜을 놓고 키보드와 마우스를 잡았다.
대학생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편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익명 페이스북 페이지 '○○대학교 대나무숲'을 찾고 있다.
대나무숲 페이지는 학교별로 올라있다.
누군가가 강제로 시켜 만든 것도 아니다.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페이지를 만들었고 그들만의 규칙에 따라 운영하고 있다.
페이지를 관리하는 사람 또한 철저히 비밀에 부쳐진다.
페이지 이용자들은 페이지 관리자에게 '익명' 제보를 먼저 해야하고 제보된 글이 대나무숲 페이지에 오른다.
학교마다 기준은 다르지만 보통 과도한 홍보 글이나 특정 인물을 비방하는 글 등은 걸러진다.
고려대 대나무숲 페이지에는 1만5000건, 연세대 대나무숲에 올라온 대학생들의 구구절절한 사연은 4만건 등을 훌쩍 넘어섰다.
연세대 대나무숲은 '연세대학교 안타깝숲' 페이지를 따로 만들었다. 대나무숲 페이지에 올릴 수 있는 메시지 양이 초과된 사연은 사연을 올린 학생의 동의 하에 '안타깝숲'에 올라온다.
대나무숲 페이지에 자주 들어간다는 이모(22)씨는 "내 생각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대학생이 많아 공감하기 위해 대나무숲 페이지에 자주 들어간다"며 "얼굴이나 이름이 드러나지 않아 부담이 없고 많은 사람들의 말을 한꺼번에 들어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 개인적 생각은 물론 치열한 '고발'까지…각양각색 고민들
대나무숲 페이지는 익명성이 제거되지 않아 일상에서는 털어놓지 못하는 이야기들이 실시간으로 올라온다.
"이게 썸(이성간 사귀기 전 단계를 일컫는 신조어)인지 뭔지 잘 모르겠어요. 연애를 잘 못해서 제가 별거 아닌 사실에 김칫국 마시는 것 같아요. 객관적인 판단을 위해 제보해요"
대학생들은 이 페이지에서 연애상담, 취업상담 등 개인적인 고민을 쏟아낸다.
이들은 대나무숲 페이지에서 자신이 겪은 불합리한 일에 대해서도 서슴없이 고발한다. 이들의 고발은 사회적 이슈가 되기도 했다.
최근 건국대학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OT)에서 일어났던 성추행 사건의 고발도 '건국대학교 대나무숲'에 올라온 글이 발단이 됐다.
지난달 26일 건국대학교 대나무숲에는 이번 입학한 신입생이라고 밝힌 한 학생이 "OT에서 한 게임들이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학생 간 성추행 문제를 제기했다.
글을 올린 이 신입생은 "'25금 몸으로 말해요'라는 게임을 하던 중 펠라XX와 같은 제시어가 나왔고 선배들이 몸으로 표현했다"며 "충격적이고 보기 민망했다"고 밝혔다.
이어 "이른바 '방팅'을 하면서는 여학생들은 방에 있고 남학생들이 방을 옮겨다니며 똑같이 했다"며 해당 사건에 대한 불쾌감을 표시했다.
이에 대해 해당 학과는 학과 페이스북 페이지에 사과문을 올렸다.
경희대학교 체육대학는 'OT비 논란'으로 홍역을 치렀다.
이 또한 '경희대학교 대나무숲' 페이지에 한 학생이 '체육학과 16학번 OT에 대해 제대로 된 설명이 듣고 싶다'는 내용의 글을 올리며 논란이 시작된 것.
자신을 올해 졸업하는 경희대 재학생이라고 소개한 A씨는 "숙박비 9만4000원, 행사비 2만원, 간식비 6000원, 단체복 15만원, 학생비 11만 원 등이 책정됐는데 어떻게 산정된 금액인지 궁금하다"며 의문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경희대 체대 학생회 측은 "체육대학은 이전부터 학생회비 사용내역을 따로 공개하고 있지 않습니다. 계속 유지할 예정입니다"는 답변을 남기기도 했다.
대학생 허모(26)씨는 "우리학교 대나무숲 페이지 같은 경우 관리자가 누군지조차 드러내지 않는다"며 "확실한 익명성 보장과 함께 학생들이 자신의 문제에 대해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게 된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대나무숲에도 고발성 메시지가 많이 올라오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조숙빈 기자 페이스북에서 '대나무숲'을 검색해보니 각 대학별 대나무숲 페이지가 등장했다. 고려대학교 대나무숲 페이스북에 올라온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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