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최초 여성총통 나올 듯…16일 대선·총선 동시실시

여론조사, 민진당 차이잉원 후보의 압승 점쳐<br />
민진당, 처음 대선·총선에서 모두 승리할 듯

편집부

news@bujadongne.com | 2016-01-14 09:29:36

(서울=포커스뉴스) 대만이 이틀 후인 16일 선거를 통해 새 총통을 선출한다. 퇴임하는 국민당의 마잉주(馬英九) 총통은 이미 2차례 총통을 지내 출마 자격이 없다. 마 총통이 후임으로 앉히고 싶어 하는 국민당의 주리룬(朱立倫) 후보는 낮은 지지율로 휘청거리고 있다. 대세는 여론조사에서 단연 앞서 가고 있는 야당 민진당의 차이잉원(蔡英文·여) 후보 쪽으로 기울었다. 이변이 없는 한 차이 후보가 대만 사상 첫 여성 총통에 오를 것이 확실시된다. 제3의 후보인 친민당 쑹추위(宋楚瑜)의 지지율은 주리룬에게 뒤진다. 주리룬과 쑹추위의 지지율을 합해도 차이잉원의 그것에 미치지 못할 정도로 차이잉원이 단연 선두다.

과거 대만에서 선거 관련 여론조사가 적중하지 않은 적도 있었지만, 이번 여론조사가 선거결과로 그대로 이어진다면 차이잉원은 자신이 총통이 되는 것과 더불어 정원 113명인 대만 입법원(의회)에서 민진당이 다수당이 되는 것을 보는 행운도 함께 안을 수 있다. 총통을 더러 야당에 내주기는 했어도 의회만은 장악해 온 국민당의 정치 아성이 흔들릴 판이다.

차이 후보는 1956년 대만 남부 핑둥(屛東)현의 부잣집에서 태어났다. 대만의 서울대에 해당하는 대만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코넬대와 영국 런던정경대(LSE)에서 각각 석사와 박사를 땄다. 1984년 귀국해 대만정치대학 법학과 교수로 임용됐다. 그러다 1992년 국민당의 리덩후이(李登輝) 총통에게 발탁되어 경제부 고문, 공정거래위원회 위원, 국가안전회의 자문위원 등을 지냈다. 2000년 민진당의 천수이볜(陳水扁) 총통이 정권 교체를 이루면서 천 총통 밑에서 대륙위원회 주임(장관)을 시작으로 입법원(국회) 위원, 행정원 부원장(부총리) 등 고위직을 두루 거쳤다. 현재는 민진당 주석(당수)이다.

차이 후보는 이번 선거전에서 부진한 대만 경제를 되살리겠다고 공약했다. 구체적으로 인도·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동아시아와의 경제교류를 확대함으로써 국민당 정권에서 강화해 놓은중국 본토에의 과도한 경제의존에서 탈피하겠다는 것이다. 차이 후보의 이런 구상은2000~2008년 민진당 집권 기간 중 발생했듯이 대중(對中)관계에 파열음을 낼 수 있다. 중국 국영 언론매체들은 차이 후보가 ‘사악한 언설’과 ‘불평’을 늘어놓음으로써 ‘양안(兩岸·중국과 대만)관계에 새로운 도전’을 초래했다고 이미 비난을 쏟아냈다. 대만의 역대 선거는 예외 없이 중국이라는 렌즈를 통해 관찰해야만 선거에 미치는 정치적 변수를 읽어낼 수 있다. 과장되게 표현하자면 대만 선거는 중국 선거이기 한 것이다. 지난해 11월 7일 시진핑 중국 주석이 마잉주 대만 총통과 싱가포르에서 만나 서로를 ‘선생’이라고 호칭하며 역사적인 회동을 가진 것도 대만 대선국면에서 중국이 국민당을 측면 지원하기 위한 의도가 강했다. 중국으로서는 ‘대만적’ 성향이 농후한 민진당 출신 총통이 달갑지 않은 것이다.


중국과 대만은 대단히 미묘한 관계다. 장제스의 국민당 군대가 마오쩌둥의 공산당 군대에 패한 뒤 장제스는 1949년 대만으로 건너가 그곳에 ‘망명정부’를 세웠다. 그때 이후 대만은 한동안 국제사회에서 유일한 중국의 합법정부로 인정받았다. 그러다 중국에 유일 합법정부 지위를 빼앗기고 중화권의 변방으로 밀려났다.

오늘날까지도 중국은 대만을 필요하다면 무력으로 되찾아야 할 “변절한 성(省)”으로 간주한다. 중국의 압력 때문에 현재 세계에서 대만을 공식적으로 승인하는 나라는 몇 개 되지 않는다. 미국은 1978년, 한국은 1992년 각각 대만과 단교했다. 대만은 유엔 회원국도 아니다. 국제사회에서 국가로 승인받지 못한다는 것은 대만이 자유무역집단들에 끼이지 못해 교역상 이득을 충분히 누리지 못한다는 의미다. 대만은 국제회의나 스포츠 행사에 참가할 때 어쩔 수 없이 ‘중화대북(中華臺北·Chinese Taipei)’이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그럼에도 지난 10년에 걸쳐 양안관계는 상당히 회복되었다. 이는 ‘92공식’(九二共識: 1992년 하나의 중국을 인정하되 각자 명칭을 사용하기로 한 중국-대만 간 합의)에 토대를 두고 이뤄진 발전이다. 중국과 대만은 지난해 11월 양안 정상회담에서 설치하기로 합의한 핫라인을 지난달 30일 정식 개통했다. 마샤오광(馬曉光) 중국 국무원 대만판공실 대변인은 “이날 양안 간 핫라인을 통해 장즈쥔(張志軍) 대만판공실 주임과 샤리옌(夏立言) 대만 행정원 대륙위원회 위원장이 통화하면서 양안관계의 발전성과를 평가하고 새해인사를 나눴다”고 밝혔다.

하지만 민진당은 ‘92공식’을 인정하지 않는다. 민진당은 당 강령에 대만 독립을 명기하고 있다. 하지만 근년 들어 실용주의적 입장에서 이런 독립 기조를 완화해 왔다. 대만 독립을 목청 높여 주장했다가는 중국으로부터 미사일 공격이나 침략 위협까지 받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이 2005년 제정한 반분열국가법(反分裂國家法)은 만약 대만이 독립을 선언하면 무력을 사용한다고 돼 있다.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미국이 대만에 무기를 공급하도록 조약에 의해 의무화돼 있다는 사실이다. 과거 미국은 대만해협을 사이에 두고 중국-대만 간 위기가 고조되자 해군을 현지에 파견한 적이 있다.


미국 랜드연구소의 중국전문가 스콧 W. 해럴드가 타임지에 밝힌 바에 따르면, 민진당의 총통선거 승리는 “양안 관계에 방침, 기조, 전망의 매우 본질적인 변화”를 의미할 수 있다. 이 경우 미국의 우선적인 관심사는 “일부러 도발적이거나 불필요하게 중국과의 차이를 강조하는 조처들을 취하지 말하고 대만인들을 설득하는 것”이다. 해럴드에 따르면 이런 것들은 물론 민진당에 의해 직접 초래되는 것은 아니다. 대만인들이 그들의 지도자를 민주적으로 선출하는 것은 아무런 잘못이 없으며 단지 문제가 되는 것은 중국 측 대응이다.

국민당 원로들은 민진당이 정치적 이득을 노려 대만의 정체성을 독자화하는 일에 과도하게 매달린다고 본다. 쉽게 말해 표를 얻기 위해 ‘대만 독립’이라는 구호를 선전용으로 쓴다는 것이다.

2300만 대만 인구의 95%는 한족(漢族)이다. 나머지는 원주민이다. 한족은 두 종류로 나뉜다. 한 부류는 1949년 장개석 군대가 건너오기 전부터 대만에 살았던 사람들이고, 다른 부류는 장개석 군대와 함께 건너와 대만에 새로 정착한 사람들과 그 후손들이다. 후자는 현재 전체 인구의 20%에 달하는데 이들이 역사적으로 대만에서 영향력을 발휘해 왔다. 이들은 대만이라는 지명 대신 고풍스러운 중화민국(中華民國)이라는 명칭을 선호한다.

대만의 신세대는 자신들을 단지 대만인으로 여길 뿐 역사에 대해서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 국제사회가 대만을 국가로 인정하고 않고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들 젊은이는 국민당이 중국과 갈수록 가깝게 지내면서 대만이 중국에 의해 반쯤 식민지화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강하다. 공포감에 가까운 이들의 대(對)중국 정서는 지난해 3월 마잉주 총통이 비밀리에 본토와의 무역협정을 다수 체결하고 난 뒤 대학생 시위대가 의회를 점거한 사건에서 잘 드러난다.


“하나의 중국”이라는 정치구호 속에 녹여 넣을 수 있을 정도로 대만의 정체성은 간단하지 않다. 대만의 공식 언어는 중국본토에서와 마찬가지로 만다린, 즉 보통화(普通話)지만 대만어는 복건어(福建語) 객가어(客家語), 심지어 영어의 영향까지 받았다. 그리고 대만은 청일전쟁 끝에 1895년 일본에 할양되어 1945년까지 일본의 식민지였다. 이에 따라 일본어의 영향도 언어에 남아 있다.

청나라가 대만에 군대를 주둔시켰지만 대만섬의 산악지역까지 장악한 것은 아니었다. 대만이 온전히 중국의 일부가 된 것은 1945년 2차대전이 끝나면서였다. 대만에는 일본 음식, 문화, 건축이 곳곳에 남아 있으며 일본과 한국 음악을 특히 젊은이들이 좋아한다.

대만에서 민진당이 부활하고 있는 것은 단지 중국에 대한 대만인들의 불신 때문만은 아니다. 국민당은 경제관리와 양안관계를 집권의 양대 기반으로 구축했지만 유권자들은 가시적인 이익은 없으면서 대만의 주권이 희석됨을 느낀다. 대만의 정체성과 관련한 이런 기본정서가 젊은 유권자들 사이에 깔려 있는데다 마잉주 정부는 소수 엘리트에만 신경을 쓸 뿐 젊은이들을 방치한다는 인상을 심어왔다.

마잉주 정부 8년 동안 대만의 생활비는 꾸준히 오른 반면 임금은 요지부동이었으며 부동산은 폭등했다. 빈부격차도 심화됐다. 청년실업률은 높은데다 초임은 형편없이 낮다. 따라서 민진당으로 민심이 쏠린 것은 이념보다는 팍팍한 삶에 대한 불만 때문인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차이잉원이 총통이 되어 경제의 문제를 바로잡겠다며 들고 나올 각종 시책이 중국 측에 의해 훼손될 수 있다고 많은 사람이 우려한다. 마잉주가 당선되기 직전인 2007년 중국은 대만에 대한 자갈 수출을 금지했다. 그 바람에 대만 건축업계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2015년 대만은 관광객 1000만명 시대를 자축했다. 이들 관광객 가운데 절반은 중국 본토에서 건너왔는데 만약 중국 정부가 자국민의 대만 방문을 억제하는 조처를 취하기라도 하면 그것은 대만 경제에 엄청난 파급효과를 미치게 된다. 대만 수출품의 25%가 본토로, 또 다른 13%가 홍콩으로 간다는 사실은 말할 것도 없다.

여러 요직을 거친 차이잉원이 이런 복잡한 양안관계를 모를 리 없다. 그녀는 최근 TV 토론에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하겠다”라고 말했다. 문제는 그녀가 속한 민진당 내부에서 대만 독립의 목소리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 방치할 경우 자칫 본토로부터 징벌적 조처를 부를 수 있다. 중국에 치우친 교역을 다변화하는 것도 차이잉원이 당선되면 서둘러야 할 과제다. ‘중국인 듯 중국 같지 않은 대만’을 다스리는 일은 누가 총통이 되더라도 쉽지 않다.차이잉원 대만 민진당 총통후보(가운데)가 10일 트럭을 타고 대만 남부 타이난의 거리를 달리며 지지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Photo by Ashley Pon/Getty Images)2016.01.14ⓒ게티이미지/멀티비츠 지난해 11월 7일 싱가포르의 샹그릴라 호텔에서 역사적으로 회동한 시진핑 중국국가주석(왼쪽)과 마잉주 대만 총통.(Xinhua/Rao Aimin) (dhf)2016.01.14 신화/포커스뉴스 타이베이의 명물인 101빌딩을 배경으로 밤에 야외 카페에 앉아 담소하는 시민들.(Photo by Ashley Pon/Getty Images)2016.01.14 ⓒ게티이미지/멀티비츠 상하이 구시가지를 둘러보는 관광객들. 멀리 고층빌딩이 숲을 이룬 신시가지가 보인다.(Photo by China Photos/Getty Images)2016.01.14 ⓒ게티이미지/멀티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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