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된 유럽, 통합의 길을 묻다
나이리 우즈 교수의 진단과 전망<br />
"영향력 갖되 한껏 활용은 못해”
편집부
news@bujadongne.com | 2015-12-28 10:11:06
△ 유럽연합
(서울=포커스뉴스) “유럽연합(EU)은 포위당했다. 시리아·아프가니스탄·이라크 등지에서 밀려드는 수많은 난민은 유럽 중심부에서 EU의 단일 국경을 시험했다. 현재도 진행 중인 그리스 재정 위기는 EU의 단일통화에 시련을 안겼다. 영국은 조만간 EU에 잔류할지 말지를 국민투표에 부칠 예정이다. 단일 국경, 단일 통화, 안정적 회원국을 갖춘 EU의 생존은 그 어느 때보다 덜 가능해 보인다.”
나이리 우즈(Ngaire Woods) 옥스퍼드대학교 블라바트닉 정치대학 학장 겸 글로벌경제관리 교수는 미국에서 발행되는 격월간 외교전문지 포린어페어스 2016년 1·2월호 기고문 ‘유럽의 분열-유럽대륙은 어떻게 길을 잃었나’에서 오늘의 유럽을 이렇게 진단하고 있다.
◇ 길 잃은 유럽
유럽의 연방주의자들은 이런 문제들은 단지 성장통(成長痛)이라며 별 것 아니라는 입장이다. 유럽연방을 지향하는 이들 지식인은 EU가 지금 대단히 야심적인 작업, 즉 주권·국가지위라는 뿌리 깊은 관념에 도전하는 유럽의 비전을 추진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EU의 창시자인 프랑스 경제학자 장 모네는 2차 대전의 참상을 면밀히 조사하고 난 뒤 이런 소감을 밝혔다. “개별국가들이 주권에 기초해 재구성된다면 유럽에 평화는 없을 것이다…유럽국들은 너무 작아서 국민에게 필요한 번영과 사회 발전을 보장할 수 없다. 유럽국들은 반드시 스스로를 연방으로 구성해야 한다.”
윈스턴 처칠은 유럽의 가장 바람직한 미래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표현하기 위하여 미국을 본떠 “유럽합중국”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처칠이 구상한 ‘합중국’은 모네의 ‘연합’이 협력과 공동시장을 통해 구축되는 것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비전이 2008년 시작된 금융위기 이래 EU에 몰아쳐 오고 있는 시련을 견뎌내 수 있느냐이다.
1999년 유로화가 도입되자, 개별국가들이 자국 통화 절하를 통해 금융위기에 대처할 능력을 잃게 됐다며 많은 사람이 우려했다. 하지만 이런 우려는 정치통합의 논리에 압도당했다. 유로화 지지자들은 개별국가들이 과도한 부채만 쌓지 않으면 위기를 피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유로화 지지자들의 견해는 2008년 미국에서 터진 금융위기가 유럽으로 번지면서 큰 손상을 입었다. 2009년 10월 그리스 총리가 된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는 그리스 부채가 그간 엄청나게 과소(過少)보고돼 왔음을 알게 됐다. 그리스에 돈을 빌려준 주체들 가운데 특히 프랑스·독일 은행들은 그리스 부채에 과다(過多)노출됐다. EU는 위기확산을 우려해 국제통화기금(IMF)을 불러들였다. 그런데 위기는 진짜 확산되었고 이내 아일랜드,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페인에 영향을 미쳤다. 각국 정부는 부지런히 협상했고, 이른바 트로이카, 즉 유럽중앙은행(ECB)·EU집행위원회·IMF는 ‘EU-IMF 합동 구제금융 프로그램’을 마련해 그리스·아일랜드·포르투갈·스페인의 재정위기를 수습할 수밖에 없었다.
◇ 현재 EU를 보는 두 가지 시각
그때 이후 EU의 대응책을 보는 외부 시각은 두 가지다. 하나는 “위기가 유럽을 단결시켰다”는 것이다. EU 회원국들은 위기를 맞아 유로화를 살리기 위해 1조 유로를 투입했다. 유로안정화기구(ESM)를 설립했고, 유럽은행동맹을 현재 구축 중이다. ECB의 권한은 강화되었으며 유럽 정상들은 그 어느 때보다 자주 만나고 있다.
다른 하나의 시각은 “EU가 뭉치기는커녕 중간에서 쪼개졌다”는 것이다. 그리스·이탈리아·스페인 등 남부 유럽국들은 EU가 그들에게 부과한 긴축방안을 성토한다. 독일·네덜란드·영국 등 북부 유럽국들은 빚 많은 회원국들에게 EU가 덜 엄격했다고 불만이다. 그리스를 향해 대놓고 EU에서 나가라고 한 북부 유럽의 정치 지도자까지 있었다.
현 시점에서, 유로존 위기에 대한 EU의 대응을 EU의 통합심화를 보여준 증거로 해석하자면 엄청난 낙관주의가 필요하다. 더 다루기 힘들고 분열된 EU, 창립자들이 내걸었던 비전으로부터 멀리 표류하는 EU라는 전망이 더 그럴 듯하다고 우즈 교수는 진단한다. 그녀의 이러한 진단은, 겉으로 드러난 EU의 일체감 표현보다 내면적인 통합이 아직 불완전하다는 기본인식에 근거한다. 공통의 상징과 관행을 수십 년 동안 쌓고 사용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드러난 EU의 분열상은 경제통합에 이어 정치통합을 지향하는 EU의 근본적인 취지에 만족스러울 정도로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미래 EU의 세 가지 시나리오
그렇다면 앞으로 EU는 어떤 모습을 보이게 될것인가. 우즈 교수는 EU의 미래 모습으로 세 가지 가능성을 제시한다.
지방색, 지역주의, 그리고 심지어 분리주의까지 떠오르고 있는 유럽의 현 정치지형에서 EU가 취할 수 있는 한 가지 대응 방안은, 독립을 추구하는 소수 민족의 부상(浮上)을 봉쇄할 것이 아니라 수용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영국의 스코틀랜드 주민, 스페인의 바스크 주민과 카탈루냐 주민, 그리고 기타 소수 민족들에게 “유럽연합은 당신들에게 고압적으로 구는 당신들 나라의 정부로부터 당신들을 보호해 줄 수 있다”는 식의 메시지를 던짐으로써 이들 소수민족이 EU와 더 긴밀해지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은 정치적으로 더 활기차고 참여적인 유럽을 건설하는 데 들어맞는다.
두 번째 가능성은 EU에 대한 독일의 실질적인 주도권이 강화되는 것이다.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영향력·경제력에서 쇠퇴하고 있으며 영국은 유로존 회원국이 아니다. 따라서 독일은 EU의 핵심으로서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해졌다. 하지만 유로화 위기를 거치면서 독일의 막강한 영향력에 위협을 느낀 EU국들도 적지 않았다. 영국 의회의 유럽조사위원회 위원장 빌 캐시가 최근 “EU는 갈수록 비민주적인 독일 지배 하의 유럽으로 변형되었다”라고 발언한 데서 이런 정서가 잘 드러난다. 그 결과 EU국가들은 EU 규칙을 계속해서 존중하면서도 ‘유럽 연방’이라는 개념에는 갈수록 흥미를 잃어가고 있으며 EU이 안정이 독일 총리의 자제력에 달려 있음을 두려워한다.
EU의 세 번째 미래는 유럽대륙의 변화하고 있는 인구통계학에 달려 있다. 낮은 출산율과 인구 고령화로 인해 유럽에는 이민 노동력이 필요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EU집행위원회는 2014년 보고서에서 2013~2020년 기간 중 유럽의 근로인구가 750만 명 감소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만약 이민 노동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 수치는 1170만 명으로 늘어나게 된다. 유럽은 세계에서 가장 인구 다양성이 높은 지역이 돼 가고 있다. 독일 인구 8100만 명 가운데 1600만 명이 외국인이거나 이민자의 후손이며, 영국은 EU에서 독일 다음으로 이민자 비율이 높다. 다른 EU국들도 경제가 커가면서 외국인 노동력을 필요로 하게 된다. 지정학적으로 이민을 막을 수 없는데다 인구통계학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이민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에 유럽은 앞으로 더 미합중국처럼 되어갈 것이 뻔하며, 이렇게 되면 유럽통합은 가속화된다. 다만 단기적으로는 과도한 난민 유입에 대한 반발로 이민과 유럽통합 심화에 대한 반대가 가속화할 수 있다.
◇ 독일이 지도하는 가운데 협력하는 EU
우즈 교수가 전망하는 가장 가능성 높은 EU의 미래는 독일이 지도력을 발휘하는 가운데 협력을 계속해 나가는 것이다. 이런 구도에 두려움을 느끼느냐 여부는 독일 내부의 정치, 그리고EU의 공동이익에 집중하게끔 독일을 순치(馴致)해 나가는 유럽 대국들의 의지에 달려있다. 장기적으로 독일 내부의 정치는 독일의 인구 구성이 변화하면서 함께 변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인구통계학적으로 더 다양한 유럽은 EU 각국의 정치를 변화시킬 것이며 궁극적으로 더 큰 통합을 더 쉽게 만들 것이다.
유럽연방이라는 구상은 유럽 내부의 평화, 그리고 세계에 대한 유럽의 영향력을 약속했다. 하지만 유럽은 그런 미래를 향해 가고 있지 않다. 유로화 위기는 유럽통합의 기초를 뒤흔들었다. 유럽국들은 지난 60년 간 성공적으로 협력해 왔으며 독일의 주도권이라는 우산 아래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갈수록 강화되는 독일의 지도력 덕분에 협력이 촉진되면서 동시에 통합 심화가 저지된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그 결과, EU는 앞으로 세계 속에서 집단적인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계속 갖되 그것을 한껏 활용하지는 못하리라는 것이 우즈교수의 결론이다.벨기에 수도 브뤼셀의 유럽연합 본부 건물 앞을 한 여인이 지나가고 있다.(Photo by Carl Court/Getty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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