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뷰하는 김시스터즈 멤버 김민자
(서울=연합뉴스) 홍기원 기자 = 한국 최초의 걸그룹으로 불리는 김시스터즈 멤버 김민자가 11일 오후 서울 용산구 동자동의 한 호텔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민자는 제11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김시스터즈의 미국 진출기를 담은 음악 다큐멘터리 '다방의 푸른 꿈'이 개막작으로 선정돼 한국을 찾았다. 2015.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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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자 "김시스터즈는 인생 모든 것…K팝 스타들 환상적"
원조 한류 걸그룹 멤버…'제천국제음악영화제' 참석 차 28년 만에 방한
"고모 이난영 가장 닮아…'에드 설리번 쇼' 덕에 큰 성공"
(서울=연합뉴스) 이은정 기자 = 1960년대 미국 CBS 인기 TV쇼 '에드 설리번 쇼'.
쌍둥이처럼 앞머리를 내리고 하나로 질끈 동여맨 머리, 몸에 딱 붙는 반짝이 의상을 입은 세 동양 여성은 하모니를 이뤄 노래하다가 각종 악기를 바꿔가며 합주를 한다.
김민자가 드럼을 치고 김애자와 김숙자는 트럼펫, 트롬본, 벤조, 클라리넷 등을 능숙하게 바꿔가며 흥을 돋운다.
이들은 1953년 결성돼 음반을 내고 활동한 한국 최초의 걸그룹이자 1959년 아시아 걸그룹 최초로 미국에 진출한 원조 한류 그룹, 김시스터즈다.
무척 놀라운 건 이들이 노래와 춤은 물론 가야금, 장구, 기타, 색소폰, 트럼펫, 아이리시 백파이프 등 13개가 넘는 동서양 악기를 프로페셔널 하게 연주했다는 점이다. 당시 미국에도 '앤드류 시스터즈', '맥과이어 시스터즈' 등이 있었지만 이들처럼 악기를 연주하진 않았다.
소녀시대, 투애니원 등 수많은 K팝 걸그룹이 세계무대를 누비는 지금, 반세기 전 실크로드를 개척한 김시스터즈는 어느새 세월에 묻혔다.
김시스터즈는 '목포의 눈물'을 부른 이난영과 작곡가 김해송 부부의 두 딸 김숙자(76)·故 김애자와 조카 김민자(74·이난영의 오빠인 작곡가 이봉룡의 딸)로 구성됐다.
그중 김민자가 한국을 찾았다. 헝가리의 재즈 뮤지션 '토미 빅'과 결혼해 부다페스트에 사는 그는 오는 13일 개막하는 제11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참석 차 남편과 방한했다. 김시스터즈의 미국 진출기를 다룬 음악 다큐멘터리 '다방의 푸른 꿈'은 이 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됐다.
11일 용산구 동자동의 한 호텔에서 만난 그는 "1970년 김시스터즈의 귀국 공연 때, 1987년 아버지 돌아가실 때 한국에 왔으니 세 번째이고 28년만"이라며 "한국말은 서툴지만 며칠 머물렀다고 한국에 사는 기분"이라고 시원스레 웃었다.
"1973년까지 김시스터즈로 활동한 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살다가 남편의 고국인 헝가리로 5~6년 전 이주해 살고 있어요. 헝가리에서 남편이 유명한 뮤지션으로 왕성하게 활동해 큰 무대에 함께 오르곤 하죠."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는 김시스터즈의 모든 기억을 품고 있었다. 한국말과 영어를 섞어가며 말했지만 눈빛이 빛났고 노래 한 소절을 불러줄 때는 소녀 같은 표정이 됐다.
이난영은 한국전쟁 당시 김해송이 납북되고 중구 필동 2가 집이 폭격을 맞아 무너져내리자 오빠 이봉룡과 함께 '시스터 그룹'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우린 밥을 먹고 살아야 했으니까요."
1953년 수도극장에서의 데뷔 무대를 기억하느냐고 묻자 "아, 수도극장 생각나요. 그래, 수도극장이었어요"라며 추억 속의 이름만으로도 얼굴이 환해졌다.
"그땐 한국 노래를 불렀어요. 처음 무대에 올라갔는데 우리가 가야금도 연주하고 장구도 치니 사람들이 무척 좋아했죠. 그때 그룹을 열심히 하면 성공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들은 무대를 옮겨 미8군에서 활동했다. 이때는 공연하면 돈 대신 위스키를 받았고 위스키를 팔아 살림에 보탰다.
미군들은 '미국에 가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지만 갈 방법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라스베이거스에서 프로덕션을 하는 '톰 볼'이 일본 방문 길에 입소문을 듣고 이들을 찾았다. 그 앞에서 오디션을 봤고 '일단 3개월을 해본 뒤 성공하면 계속해보자'는 계약을 했다.
그는 "톰 볼은 우리에게 '쇼 미 왓 유 캔 두'(Show me what you can do)라고 했다"며 "우리 셋은 기타 하나에 노래를 불렀다. 톰 볼이 기회를 줘 우리가 성공한 것"이라고 돌아봤다.
영어도 못하는 채 도전한 미국행은 처음엔 고행길이었다. 음식도 안 맞고 아는 사람도 없었다. 뜻도 모른 채 영어 곡을 외워 썬더볼 호텔에서 첫 무대를 선보이자 '브라보'가 터져 나왔다. 큰 호응이 있자 톰 볼은 이들이 8개월간 스타더스트 호텔에서 공연하는 장기 계약을 했다.
어느 날 스타더스트 호텔에서 '에드 설리번 쇼' 촬영이 열렸고 이들은 출연 기회를 얻었다. '에드 설리번 쇼'는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스, 롤링스톤스 등 당대 최고의 팝스타들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는 "첫 출연 때는 에드 설리번이 누구인지도 몰랐다"며 웃었다.
이어 "미국 활동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도 '에드 설리번 쇼'에 선 것"이라며 "너무 큰 쇼여서 무척 떨렸다. 무대 시작하기 전에 서로 용기를 주며 '웃자, 웃자'고 했다. 그 쇼 때문에 우리가 크게 성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들은 이 무대에 20번 가까이 출연했는데 매번 새로운 악기를 연주하며 에드 설리번을 놀라게 했다. 한번은 프랭크 시내트라가 이들의 공연을 본 뒤 테이블로 초대해 칭찬하기도 했다.
"애자와 제가 번갈아 멜로디를 리드하고 낮은 음색의 숙자는 하모니를 넣었죠. 대신 숙자 언니는 악기를 정말 잘 다뤘어요."
그는 "온종일 연습하다 어떤 때는 고단해 그만두고 싶었지만 성공해야 한다고 다잡았다"며 "다양한 악기를 미국서 전문 연주자들에게 배우곤 했다"고 말했다.
'동양에서 온 마녀'로 불린 이들은 NBC '닥터 마틴 쇼'에도 출연했고 미국 유명 매거진 '라이프' 등 유수의 매체에도 소개됐다.
그는 "환상적이었다"며 "자부심을 느꼈다. 노력의 대가를 받은 것 같아 보람이 컸다. 많은 잡지와 매체들이 우리를 인터뷰했다"고 떠올렸다.
이들의 개런티는 1인당 국민 소득이 2천76달러이던 시절 스타더스트 호텔에서 받은 주급이 1만5천 달러였다는 얘기도 있다.
그는 "많이 벌었지만 많이 썼다"고 에두르며 웃었다.
이들이 미국 진출 10년 만에 발표한 '김치 깍두기'는 이들의 향수를 고스란히 반영했다. '김치 깍두기'는 이봉룡이 딸과 조카들의 김치 사랑을 담아 만든 곡이다.
"아버지가 '한국 사람인데 김치를 얼마나 먹고 싶어했느냐'라며 이 곡을 만드셨죠. 지금도 김치가 없으면 못 살아요. 하하."
이들은 1970년 서울시민회관에서 귀국 공연을 열며 금의환향한다.
그는 "비행기에서 내릴 때까지 한국 사람들이 우릴 어떻게 대할지 몰랐다"며 "뉴스에서 다 나오고 환호해줘 믿을 수가 없었다. 감개무량했다. 우리가 '목포의 눈물'을 부르니까 관객들이 울었다"고 기억했다.
그러나 정작 이들을 키워낸 이난영이 1965년 세상을 떠날 땐 누구도 빈소를 찾지 못했다.
"1년 내내 공연이 잡혀 있어 멈출 수 없었어요. 계약 위반이 되니까요. 또다시 우릴 원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마음이 아프고 힘들었지만, 그땐 사정이 그랬어요."
그는 이난영에 대해 "노래, 연기, 비즈니스까지 재주가 많은 분이었다. 훌륭한 리더였다"며 "고모가 나를 가장 좋아했는데, 사람들이 내 얼굴이 가장 고모를 닮아 친딸인 줄 알았다"고 웃었다.
이난영은 미국 진출 당시 이들에게 '성공할 때 계단을 하나씩 밟아야 하며, 성공할수록 인사를 잘하고, 그룹이 깨지지 않도록 절대 데이트를 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 명씩 짝을 찾기 시작했다. 1967년 김애자와 김민자가 차례로 결혼했고 1968년 김숙자가 결혼했다.
김민자는 "우리가 스타더스트 호텔에서 공연할 때 남편을 만났다"며 "남편이 좋아한다는 신호를 줬지만 처음엔 눈을 마주치치 않으려 했다. 그런데 비브라폰을 배우며 만나게 됐다"고 웃었다.
김애자는 1987년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고 김숙자는 현재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살고 있다.
팀 해체 배경을 묻자 그는 이렇게 에둘렀다.
"자세히 얘기하긴 어렵지만 여러 일이 생겼고 안타깝게 끝났어요.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도 최선을 다해 인생을 사는 수밖에 없죠."
그는 "결혼 후 아이를 낳자 육아가 주는 행복이 있었다"며 "어려서부터 공연하며 여행 다니니 새로운 삶이었다. 아들은 음악적인 재능이 뛰어나지만 뮤지션은 아니다. 마흔이 된 아들이 아직 결혼을 안 했는데 빨리 할머니가 되고 싶다"고 웃었다.
그에게 화려한 청춘이던 김시스터즈는 어떤 의미일까.
"김시스터즈는 제 인생의 모든 것이었어요. 좋은 일, 나쁜 일 온갖 걸 겪으며 인생을 배웠으니 제게 있어 모든 것이라 말할 수 있죠. 김시스터즈를 통해 남편을 만났지만 지금은 남편이 우선이에요. 하하."
그는 '제천국제음악영화제' 개막 무대에서 '목포의 눈물'과 '다방의 푸른 꿈', '고향설'을 부를 예정이다.
또 오는 16일 시스터즈 그룹의 맥을 잇는 미미시스터즈와 바버렛츠가 김민자의 방한을 기념해 마련한 공연에도 초대받아 들를 예정이다.
"제가 이 후배들 노래는 몰라도 '김치 깍두기'는 함께 부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는 지금의 K팝 그룹들의 활약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언젠가 유럽 여행 때 호텔에서 TV를 트니 한국 채널이 나왔다"며 "젊은 친구들이 춤도 잘 추고 외모도 너무 멋있고 환상적이었다. 그런 한국의 팝스타가 있는 게 놀라웠다. 미국 그룹보다 더 잘하더라. 대단하고 자랑스러웠다"고 칭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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