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원폭70주년에 맨해튼계획국립공원 출범…원폭해석 주목-2

편집부

news@bujadongne.com | 2015-08-05 06:00:06

△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안 한국인원폭희생자위령비 앞에서 지난 2013년 8월5일 열린 위령제.

美, 원폭70주년에 맨해튼계획국립공원 출범…원폭해석 주목-2



◇ 한국 피폭자들, 원폭 해석보다 `존재 입증'이 급해





아메리칸대박물관에 전시된 마루키 부부 화가의 그림 중 두 점은 원폭 투하로 사망한 강제징용 한국인들과 미군 전쟁포로를 그렸다.

마루키미술관 홈페이지의 설명에 따르면, `까마귀'라는 제목이 붙은 전율스러운 수묵화는 까마귀들이 한국인 주검들에 내려앉아 눈알을 쪼고 있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죽어서도 차별받는" 식민지 조선인들의 처지를 형상화했다.

마루키 부부는 그림에 붙인 시에서 "조선인들의 주검은 마지막까지 거리에 방치됐다"고 적었다.

부부는 별도의 그림 주석에선 "나가사키 미쓰비시(三菱) 조선소에는 한국에서 강제동원된 노동자가 5천 명 이상 있었고, 히로시마에도 강제징용 한국인들이 많았다"고 적었다.또 "오늘날(그림을 완성한 1972년) 한국에만도 생존 피폭자가 1만 5천 명 정도 있으나, 피폭자로 공식 인정받지 못해 아무런 지원도 못 받고 있다"고 차별과 망각의 존재로 남아있는 한국인 피폭자들의 실상을 전했다.

미쓰비시라면, 최근 태평양전쟁 당시 미군 포로를 강제노역시킨 데 대해 사과하고, 영국, 네덜란드, 호주의 전쟁포로들에 대해선 물론 중국의 강제징용 노동자들에 대해서도 사과할 용의를 밝히면서도 한국인 징용 피해자들에 대해선 법적인 상황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과를 거부하는 회사다.

미국 등은 일본과 대등한 지위에서 싸운 나라들이지만,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기에 1938년 국가총동원법에 따라 일본인들과 마찬가지로 합법적으로 징용됐다는 주장이다.

미쓰비시측은 지난달 22일 외신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일본의 한국 병탄을 "근본적인 죄"라면서도 불법이라는 표현은 애써 피했다.

그러나 `일본인들과 마찬가지로 합법적으로 징용'됐다는 한국인 징용 피폭자들은 피폭 치료지원과 배상에선 일본 정부로부터 일본인 피폭자와 동등한 대우를 받은 적이 없다.

(사) 한국원폭피해자협회에 따르면, 원폭 투하 당시 강제징용 또는 이주 등으로 히로시마에 거주하던 한국인 약 8만 2천 명 가운데 5만 명이 원폭을 맞아 3만 명이 사망하고 생존 피폭자 2만 명 가운데 1만 5천 명은 귀국하고 나머지 5천 명은 일본에 잔류했다.

나가사키에선 1만 명이 사망하고 생존 피폭자 8천 명은 귀국, 2천 명은 잔류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합해 귀국자 중 2천 명 정도는 북한으로 갔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로 인한 인명피해가 70만 명으로 추산되는 만큼 한국인 피해자는 그 10%에 해당한다. 그러나 사망자로 보면 히로시마 14만 명과 나가사키 7만 명을 합해 21만 명 중 4만 명이니 4분의 1에 이른다. 이들 수치는 모두 추정치이다.

일본 정부는 한국 거주 한국인 피폭자는 일본 피폭자를 위한 원호법 적용 대상에서 배제해오다 지난 2002년 '피폭자 자격 확인 소송' 판결을 계기로 이듬해부터 한국 등 일본 밖 거주 피폭자들에게도 의료비 지원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인 피폭자는 상한선이 없는 데 반해 한국인 피폭자는 1년에 30만 엔의 상한선을 두는 차별은 여전한 점 때문에 협회는 일본 오사카에서 상한선 폐지 소송을 제기, 고등법원까지 승소한 상태라고 한국 원폭피해자협회의 원정부(76) 서울시지부장은 말했다.

피폭 1세대인 원 지부장은 4일 전화통화에서 일본에서뿐 아니라 돌아온 고향 한국에서도 차별과 망각의 대상으로 지내온 피폭 1세대와 그들의 신체적 고통과 사회·경제적 고초를 물려받은 자손 세대를 위한 치료와 생계 지원이 협회 차원에서 급선무라고 호소했다.

현재 생존한 피폭 1세대는 2천500여 명으로 평균 나이는 82세에 이른다.

협회는 다른 시민단체들의 도움을 받아 원폭 피해실태 조사와 지원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추진하고 있으나, 국회 보건복지위 여야 의원들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지난 2월 임시국회부터 번번이 영유아법,메르스 사태 등에 밀려 의안 상정이 미뤄지고 있다.

한국 정부가 1965년 한일협정 체결 때 청구권 협정을 이유로 일본 정부를 상대로 원폭 피해자를 위한 명예회복과 피해 배상을 받아내는 노력을 하지 않은데 대해 2011년 헌법재판소로부터 위헌 판결이 나기도 했다.

원 지부장은 "그러나 정부는 한일 국장급 회담에서 논의하고 있다고만 말할 뿐 내용을 전혀 알려주지 않아 답답하다"고 토로했다.

정부는 원폭 피해자에 대한 공식 실태 조사조차 한 일이 없는 등 한국인 피폭자의 존재를 외면하고 있다는 지적을 듣는다.

국제사회에서도 일본이 "유일한" 원폭 피해국이라고 주장하는 가운데 2대 피해국이라고 할 한국의 원폭 사망자와 피폭자는 그에 가려져 있었다.

지난 5월1일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핵확산금지조약(NPT) 재검토 회의'에서 한국인 피폭자 심진태(72)씨가 일본 정부를 향해 "원자폭탄 피해 한국인들에게 사죄·배상"할 것을 요구한 것이 유엔에서 한국인 원폭 피해자 문제가 제기된 첫 사례일 정도다.

심씨는 "피폭 한국인 상당수가 일제에 의해 강제동원"됐었는데, "일본 정부는 한국인 원폭 피해자를 완전히 외면하고 차별"했으며, "고향으로 돌아온 피폭자 4만 3천 명은 원폭 후유증과 사회적 냉대 속에서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죽어갔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에 대해서도 "세계 최초로 원자폭탄을 개발, 투하한 원죄에 대한 책임"을 물었다.

한국 원폭피해자협회도 미국의 맨해튼계획 국립역사공원 조성 소식을 듣고 한국인 피폭자들의 존재와 생각을 이 공원에 담는 방안을 검토 중이지만, "아직 어렴풋이 소식을 들은 정도이고, 협회 구성원상 젊은 사람들이 없어 실행력이 약하다"고 원 지부장은 안타까워했다.

일본과 미국에 대한 심씨의 요구가 앞으로 협회가 검토하게 될 `원폭 해석'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원폭 투하 당시 미국과 일본의 기록 가운데 한국인 피폭자들에 대한 별도 언급을 찾기 어려운 가운데 도쿄 가톨릭대 근대철학 교수이던 존 A. 심스 신부의 원자폭탄 폭발 목격담에 고종 손자 이우를 비롯한 한국인 강제징용 노동자들의 원폭 사망을 설명한 대목이 있어 눈길을 끈다.

히로시마에서 2km 떨어진 신부 숙소에 거주한 예수회 소속 심스 신부는 자신들이 아는 단체들을 통해 자체 조사한 결과로는 히로시마 원폭 사망자를 10만 명으로 추정하는 게 "그리 과장되진 않았다"고 말했다.

심스 신부는 곧이어 "우리 숙소 인근에 막사 2채가 있는데, 한 채마다 한국인 노동자 40명이 살았다. 원폭이 터진 날 그들은 히로시마 거리에서 노역을 하고 있었다. 한 막사에선 4명이, 다른 막사에선 16명이 살아 돌아왔다"고 밝혔다.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은 사망했거나 심각한 부상을 입었을 것이므로 징용 한국인들의 피해 규모의 일단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심스 신부는 이어 히로시마 시장, 히로시마 주둔군 사령관 등과 함께 "일본군 장교로 히로시마에서 근무하고 있던 한국인 왕자 1명"의 사망 사실도 언급했다.

한국인 왕자는 고종의 손자인 이우로, 1912년 생인 그는 일본 육사를 졸업한 후 중국에서 근무하다 중좌(중령)로 히로시마로 전보된지 얼마되지 않았었다.

심스 신부의 목격담은 1944년 후반에 편찬을 시작한 맨해튼계획의 역사기록을 모은 방대한 '맨해튼지구사'에 들어있다. 8책 36권으로 이뤄진 이 기록은 상당 부분이 아직 비밀분류돼 있지만, 그것은 비밀분류된 채로 오픈넷(OpenNet) 사이트를 통해 일반에 공개돼 있다.



◇ 계속될 원폭투하 찬반 논쟁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원폭 투하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둘러싼 논란은 실제 원폭투하에 앞서 1945년 7월16일 트리니티 핵폭탄 실험에서 그 위력이 확인된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고, 핵무기가 존재하는 한 끝나지 않을 논란이다.

히로시마가 일본군의 병참기지였다고는 하지만 무고한 시민을 대량살상하는 원폭투하가 윤리적으로 정당했는가, 일본의 항복을 받기 위해 그런 대량살상 무기의 사용이 군사적으로 정말 필요했는가가 핵심쟁점이다.

찬반론자들은 이들 쟁점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역사적 사실과 기록, 추측, 예상을 동원하고, 늘 그렇듯이 풍부한 역사는 찬반 모두에 필요한 역사 기록과 추측·예상 근거를 제공한다.

이 논란은 미국과 일본간 원폭 `해석' 논란에서 일본이 은연중 세우는 `가해자'와 `피해자' 틀에 따르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부분 중첩되기에 정당성과 필요성을 부인하는 의견은 일본의 해석에 더 동정적이게 된다.

미국 시카고에 있는 알마대학의 캐나다 출신 물리학 교수 캐머런 리드는 지난 20년간 맨해튼계획을 천착해온 것을 토대로, 원폭투하를 둘러싼 논란을 '맨해튼계획 70주년 소고: 질문과 답변'으로 정리, 지난 2월 미국과학자협회(FAS) 홈페이지에 게재했다.

리드 교수는 원폭투하의 불가피성과 정당성에 대체로 찬성하는 편이지만 필요성과 정당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그에 답하는 형식으로 찬반론을 이해하기 쉽게 제시했다.

필요성 논란과 관련, 그는 원폭 투하의 필요성에 대해 딱 부러지게 그렇다, 아니다라고 답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불필요론은 1945년 여름 당시 일본은 이미 명예롭게 항복하는 길을 찾고 있었고, 일본의 항복엔 미국의 원폭이 아니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 사이인 8월8일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가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주장한다.

불필요론은 또 미국이 맨해튼계획에 막대한 자원을 쏟아부은 것을 합리화할 필요성, 그리고 종전 후 세상에서 미국에 도전할 가능성이 있는 소련에 경고 메시지를 보내려는 목적도 제기한다. 군사적 필요성보다는 정치적 필요성이었다는 뜻이다.

필요론은 당시 연합군과 일본군이 매주 수천수만 명씩 죽어가고 있었고, 일본의 항복이 불확실하던 때였음을 지적한다. 미국이 수립한 1945년 하반기와 1946년 봄의 2차에 걸친 일본 열도 공격 계획은 1945년 11월부터 이듬해 가을까지 매달 전사자가 10만 명 발생하는 것을 상정하고 있었다는 것.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사망자 수를 뛰어넘는다.

또 소련의 선전포고가 일본의 항복에 주된 요인이었다 하더라도, 대부분 역사학자들은 2차례의 원폭 투하가 일본의 항복 결심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인정한다고 리드 교수는 주장했다. 히로히토 국왕의 항복 연설에서 "새로운 매우 잔인한 폭탄"이 언급된 것으로도 원폭이 가한 충격을 알 수 있다고 그는 지적했다.

리드 교수도 원폭 투하에 "정치적 측면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그래서 필요성에 대한 자신의 대답은 "조건부 찬성"이라고 절충점을 택했다.

그는 "필요성 논란이 간과하는 핵 예방접종" 효과도 제기했다. 당시 원폭이 실제 사용되지 않은 채 세계 각국이 원폭의 위력을 알고 개발 경쟁에 나섰다면 "그후 전쟁에선 훨씬 가공할 상황이 전개됐을 것"인데, 히로시마 원폭투하가 참상을 보여줌으로써 "상당한 억지효과"를 발휘해 더 큰 전쟁의 발발을 막았다는 논리다.

윤리성 문제에 대해서도 그는 예, 아니요라는 재단을 피한 채 "제2차 세계대전의 전쟁 양상은 이미 이 쟁점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했으나, 이는 윤리성 비판을 봉쇄한다는 점에서 역시 원폭투하 찬성론 편에 선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독일, 일본 등 추축국의 민간인과 죄수들에 대한 계획적인 잔학행위는 말할 것도 없고 원폭 투하 이전 이미 연합군의 드레스덴 소이탄 공습과 도쿄 소이탄 공습도 막대한 민간인 피해를 내고 있었다고 상기했다.

그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로 인한 인명피해 대부분은 방사능 오염이 아니라 이들 공습과 마찬가지로 폭발과 열 효과로 발생한 것"이라며 "원폭이 넘어섰다는 윤리의 문턱은 이미 그 이전에 여러 차례 침범당했다"고 주장했다.



◇ 맨해튼계획과 맨해튼계획국립역사공원은





맨해튼계획은 독일에서 망명한 핵과학자들이 독일의 원자탄 개발 정보를 제공하면서 미국이 원자탄을 개발해야 할 시급성을 건의함에 따라 1942년 시작돼 1945년 히로시마 원폭 투하로 마무리됐다.

시작점을 기준으로 하면 올해가 73주년이지만, 맨해튼계획 국립역사공원을 추진해온 AHF는 실제 원폭 투하로 마무리된 점을 기준으로 올해를 70주년으로 잡고 있다.

암호명 '맨해튼'은 맨해튼계획 출범 시점엔 뉴욕 맨해튼에 추진본부와 우라늄 보관 창고 등 관련 시설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맨해튼계획은 전시에 이론물리학자 존 로버트 오펜하이머를 원폭 연구책임자로 해 당시 미국의 최고 두뇌들과 독일에서 망명한 핵과학자 등 미국의 과학역량을 총동원, 3년 만에 이론 상태이던 핵분열 에너지를 실제 무기화하고 활용했다는 점에서 특정 목표를 향한 국가역량 총동원 체제의 상징으로 꼽힌다.

맨해튼계획 국립역사공원은 원폭의 설계와 시험이 이뤄진 뉴멕시코주 로스앨러모스, 플투토늄을 제조한 워싱턴주의 핸퍼드, 우라늄 농축 시설이 있는 테네시주의 오크리지 세 곳의 건물과 시설들을 보전해 맨해튼계획과 그 산물인 원폭과 원자력의 유산을 후손에 전한다는 취지다.

미국과 소련간 냉전이 종식되자 1989년 미 의회는 핵생산시설의 오염을 제거토록 입법함으로써 로스앨러모스 국립연구소에 있는 V 사이트(최초의 실험용 원폭 조립시설)를 포함해 맨해튼계획 관련 주요 시설물 수십 곳이 철거될 뻔했다.

당시 에너지부에 근무하던 AHF의 신시아 켈리 이사장이 에너지부에 사표를 내고 AHF를 만들어 맨해튼계획 시설물의 보존 운동에 나선 끝에 2014년 국립역사공원으로 보존되게 됐다.

지난해 말 입법에 따라 이 공원은 올해 12월까지 국립공원으로 공식 출범한다.









[ⓒ 부자동네타임즈.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WEEKLY H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