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70년> 카자흐에 잠든 '백두산 호랑이' 홍범도 장군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 항일투쟁 사적지 등 방치
편집부
news@bujadongne.com | 2015-08-03 07:00:06
△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 있는 독립운동가 계봉우 선생 기념공원. 카자흐에 잠든 '백두산 호랑이' 홍범도 장군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 항일투쟁 사적지 등 방치
(크즐오르다=연합뉴스) 김현태 특파원 = 서울에서 5천㎞,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의 중부도시 크즐오르다에는 항일투쟁의 영웅들이 잠들어 있다.
광복 70주년에 찾아간 크즐오르다는 따가운 햇볕과 메마른 모랫바람으로 이방인을 맞았다.
크즐오르다 공항에서 차로 30분 거리.
한글로 '통일의 문'이라 쓰인 낡은 대문이 항일투사 추모공원임을 알리고 있었다. 발레리 박 크즐오르다 고려인 청년회장은 "찾는 이가 없어 평소엔 잠가둔다"며 녹슨 자물쇠를 힘겹게 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약 100평의 맨땅에 잡초 사이로 드문드문 선 동상 및 기념비, 묘역이 눈에 띄었다.
여천(汝千) 홍범도(洪範圖·1868∼1943) 장군, 북우(北愚) 계봉우(桂奉瑀·1880~1959) 선생. 동상과 기념비는 두 독립운동가를 기리고 있었다.
평양에서 태어난 홍범도 장군은 일제치하에서 의병투쟁에 몸을 던졌다. 장군은 대한 독립군 총사령관까지 오르며 간도와 극동 러시아에서 일본군을 토벌했다.
일본군에게는 '하늘을 나는 장군'이라고 불릴 정도로 두려움의 존재였고, 민중에게는 '백두산 호랑이' '축지법을 구사하는 홍범도 장군'으로 불릴 만큼 추앙받았다.
독립운동의 가장 빛나는 순간 중 하나인 봉오동 전투는 그의 주도로 승리했다. 그는 청산리 전투에도 참전해 큰 몫을 담당했다.
1937년 옛소련 스탈린 정권의 한인 강제이주정책으로 연해주에서 크즐오르다로 떠나온 장군은 이곳에서 75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함경도 영흥 출신인 계봉우 선생은 1910년 함흥 영생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다 성재(誠齋) 이동휘(李東輝·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1873~1935) 선생을 따라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입하며 구국계몽운동에 투신했다. 그 역시 강제이주정책으로 1937년 크즐오르다로 넘어와 여기서 생을 마감했다.
크즐오르다에는 홍범도 장군과 계봉우 선생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다.
카자흐스탄 정부는 1990년대 위인의 이름으로 거리 명을 짓는 정책을 추진한 바 있다. 당시 크즐오르다 고려인들은 홍범도 장군과 계봉우 선생을 추천했으며 1994년과 1997년 그들의 이름을 딴 거리가 각각 생겼다.
홍범도 장군의 길은 차량 왕래가 잦았다. 길 입구에는 장군의 초상화와 이름을 새겨넣은 동판이 보였다.
길은 크즐오르다의 주요도로여서 현지인들도 장군에 대해 알고 있었다. 다만, 일제에 맞서 싸운 카자흐스탄의 영웅으로 그를 기억했다.
현지 대학생 아셀은 "길 이름 때문에 크즐오르다 사람들은 홍범도를 잘 안다. 그를 카자흐스탄의 위인으로 알았는데 고려인인 건 몰랐다"라며 흥미로워했다.
계봉우 선생의 길은 찾기가 쉽지 않은 주택가의 작은 도로였다. 하지만, 길에서 마주친 주민은 선생을 유명한 크즐오르다의 위인으로 추억했다.
이곳에는 두 독립운동가의 집터도 남아있다.
후손이 현지에 사는 계봉우 선생의 자택은 외부에 선생의 초상화와 이름이 새겨진 동판이 걸려 있는 등 보존이 잘되고 있었다. 그러나 홍범도 장군의 자택은 재개발이 이뤄져 집터의 위치조차 짐작할 수 없어 복원 및 보존작업이 시급해 보였다.
장군을 기억하는 동네 사람들은 그가 철길 옆 '딱집'(토굴형태의 움막집)에 살았다며 다른 이들과 별다른 왕래 없이 크즐오르다 고려극장에서 잡일을 했던 것으로 장군을 떠올렸다.
장군은 크즐오르다에서 홀로 지낸 것으로 전해진다. 앞서 부인과 자녀는 1910년 항일운동을 벌이다 모두 순국했다.
한국정부는 쓸쓸히 남겨진 장군의 유해를 국내로 가져오려 노력하고 있으나 상황은 쉽지 않다. 장군의 고향이 평양이라 국적이 남한이냐 북한이냐는 논란이 있기 때문이다.
크즐오르다의 독립투사들은 공산주의를 받아들였다는 이유로 한국에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이 때문에 크즐오르다의 항일 유적지는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발레리 박 회장은 "현지 고려인들이 자발적으로 두 독립운동가의 사적지와 추모공원을 보존하려 애쓰고 있지만, 비용문제가 만만치 않다"며 현실적 어려움을 털어놨다. 덧붙여 "요즘 고려인 청년들은 두 분을 한국의 유명 배우나 모델로 알 정도로 잘 모른다"면서 바래져 가는 항일투쟁의 역사와 정신을 안타까워했다.
그는 그러면서 이제라도 고려인들이 조국에 대한 자긍심과 항일투사의 뜻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한국정부가 두 분의 기념관만이라도 제대로 만들어 주기를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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