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분쟁 새 불씨…터키 정부의 '위험한 도박'
편집부
news@bujadongne.com | 2015-07-30 18:10:47
△ 터키 공군기지에 착륙한 미군기(연합뉴스 사진DB)
중동분쟁 새 불씨…터키 정부의 '위험한 도박'
(서울=연합뉴스) 최병국 기자 = 터키의 '위험한 도박'이 중동 분쟁의 새로운 불씨가 되고 있다.
역내 최대의 군사력을 지닌 터키가 국제사회의 공적이 된 '이슬람국가'(IS) 공격에 나섰다.
그간 IS 공습에 불참해온 터키의 입장 전환을 환영할만한 서방 정부들의 지지 발언엔 당혹스러워 하는 표정도 담겨 있다.
터키 공군기지 사용 허가라는 '선물'을 받은 미국조차 겉으로는 환영하면서도 내심 떨떠름해 한다.
'테러분자들과의 2개의 전쟁 동시 수행'을 선언한 터키의 총구가 정작 IS 보다는 쿠르드인을 겨낭해서다.
그간 IS와의 전쟁 선봉에 서온 쿠르드인 무장세력의 향방에 따라 대(對)IS 전선이 분열될 수 있다.
이라크와 이란 등 주변 국가들도 터키의 공습에 민감하게 반응, 중동 상황이 더 어지러워지고 있다.
국내정치적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터키 정부의 '도박'이 터키 안팎의 정정에 심각한 불안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미국이 결국 터키와 한 편에 설 수밖에 없어 쿠르드인들이 강대국에 이용만 당하고 버려지는 '배신의 역사'를 다시 겪게 될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 터키, 쿠르드 무장세력 연일 대대적 공격 = 터키 전투기들은 29일 밤(현지시간) 이라크 북부 쿠르드 무장세력 거점 6곳을 대대적으로 공습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이 "국가의 통합과 형제애를 위협하는 쿠르드노동자당(PKK)과의 평화는 더는 유지될 수 없다"고 말하고 중국으로 떠난 다음 날 이뤄진 일이다.
터키 총리실은 이번 공습은 지난주 IS 및 PKK와 '두 개의 전쟁'을 동시에 진행할 것이라고 선언한 이후 가장 큰 규모의 공격이라고 밝혔다.
터키군은 지난 23일 F16전투기를 투입, 시리아 내 IS에 첫 공습을 가했다. 이어 24일 밤엔 이라크 북부 PKK 캠프 5곳을 폭격했다.
26일 밤엔 IS와 전투 중인 쿠르드 무장대원들을 겨냥해 시리아 북부 한 마을을 공습했다.
터키가 '2개의 전쟁'을 벌일 것이라고 선언하게 된 표면적 계기는 '수루치 마을 학살' 사건이다.
지난 20일 시리아 접경 터키 마을 수루치에서 쿠르드족 돕기 행사를 열던 터키 사회주의청년연합(SGDF) 행사 도중 IS의 자살폭탄 테러로 32명이 숨지고 100여명이 부상했다.
22일엔 PKK가 수루치에서 터키 경찰 2명을 사살했으며, 이스탄불 등에선 IS와 연계된 것으로 알려진 민간인들을 사살하는 등 물고 물리는 복수전이 벌어졌다.
이에 터키 정부는 'IS와 PKK 테러분자들에 대한 응징'에 나섰다.
터키는 미국이 주도하는 서방 군사동맹체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내의 유일한 무슬림 회원국이며 그간 IS 공습에 참여하지 않아 왔다.
바샤르 알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 정권과 각을 세워온 터키는 이에 저항하는 세력 중 하나인 IS를 '적의 적은 내게 도움이 된다'고 여겨왔다.
여기엔 터키와 국경을 맞댄 이라크와 시리아 내의 IS를 비롯한 무슬림 무장단체들을 굳이 건드려봐야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도 작용했다.
터키 내 쿠르드인 단체 중 하나인 PKK는 무장투쟁을 전면에 내세운 정치군사조직이다.
PKK의 테러 및 게릴라활동과 터키 군경의 대응 속에 1984년 이래 4만여 명이나 사망했다.
양측은 오랜 협상 끝에 휴전했으며, 이후 간헐적으로 충돌이 있었으나 서로 확전은 자제했다.
그런 터키가 IS 및 PKK 상대로 '전쟁'을 선포한 것은 단순히 '테러세력 응징' 차원에서만 보기 어렵다는 것이 중동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 IS 공격한다며 총구는 쿠르드족에…국내정치용 '카드' = 인권단체들과 터키 야당은 IS 및 PKK와의 전쟁 선포는 터키 집권당이 국내 정치적 위기 국면을 전환하려는 전략의 일환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서방은 물론 터키 언론도 대체로 같은 시각이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 언론매체들은 연일 터키 정부의 PKK 공습과 야당 탄압 움직임들을 강력 비판하고 있다.
터키 정부는 '2개의 전쟁' 선포를 하며 PKK와의 휴전을 더는 유지할 수 없다고 강조한 데 이어 24일부터 며칠 만에 자국 내 '잠재적 테러 용의자' 1천300여 명을 체포했다.
이 가운데 847명이 PKK 연루 혐의를 받고 있으며 IS 관련 용의자는 137명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좌익 무장세력 연루 혐의자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28일 중국 방문에 앞서 기자들에게 PKK와 연루돼 있을 경우 국회의원이라도 형사처벌 면책권을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터키는 테러리스트들과 소위 우리 순교자들의 피에 책임이 있는 정치인들을 붙잡을 수 있다"며 "이런 정당의 간부들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까지 밝혔다
이어 29일엔 얄친 악도안 부총리가 쿠르드계 야당인 인민민주당(HDD)을 콕 찍어 "정치적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PKK와의) 분쟁 해결을 도외시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나섰다.
HDP는 지난달 7일 터키 총선에서 12.8%의 지지율로 4위를 차지하고 78석을 확보했다. 쿠르드계 정당 사상 최초로 의회 교섭단체가 됐다.
이 바람에 에르도안 대통령이 창당한 집권 정의개발당(AKP)은 과반의석 확보에 실패했다.
2002년 총선 압승 이후 13년 동안 단독정부로 집권해온 AKP는 이번 총선에서 이기면 대통령제로 전환하는 개헌을 추진하려 했다.
대통령제 개헌을 관철하려는 AKP는 다시 총선을 실시, 단독 집권하려 하나 HDP가 걸림돌이다.
따라서 터키 정부가 PKK와의 휴전을 끝내고 무력충돌을 재개해 터키계 유권자의 민족주의를 부추기고 쿠르드인과 HDP의 입지를 좁히면 조기 총선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계산을 했다는 것이 유럽 언론과 터키 야당의 분석이다.
스웨덴 스톡홀름경제대학원(SSE)의 에릭 마이어슨 교수는 크리스찬사이언스모니터(CSM)와의 인터뷰에서 터키 정부와 PKK 간 유혈충돌이 다시 확대되는 상황에선 HDP가 난처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즉 "PKK를 비난하면 쿠르드 유권자 표를 잃는 위험이 있고, 쿠르드 입장 옹호 발언을 강하게 하면 터키계 유권자를 단합시키고 사법부로부터 정당활동금지 판결을 받을 위험까지 있다"는 것이다.
◇ 서방, 동맹의 행동에 곤혹…나토 어정쩡한 입장 = 미국과 유럽 등 서방은 IS와의 전쟁에서 공습만 해왔으며, 지상전은 시리아와 이라크 내 쿠르드계 무장세력에 의존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터키가 IS 등과의 전쟁을 표방하면서 실제로는 쿠르드 무장단체에 대한 공격 등에 주력하자 당혹스러워 하고 있다.
터키는 '2개의 전쟁'을 선언하면서 지난 26일 나토에 긴급안보회의 소집을 요청했다.
'자국의 영토 보전과 안보에 위협을 받는 동맹국은 전체회의를 소집할 수 있다'는 나토 조약 4조에 근거한 이 회의는 나토 사상 5번 밖에 없었으며, 이 가운데 4번을 터키가 요청한 것이다.
나토는 28일 성명에서 "어떠한 형태의 테러도 용납되거나 정당화될 수 없다. 터키안보 상황을 면밀하게 지켜보고 있으며, 동맹국 터키와의 강력한 연대를 유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CNN 방송을 비롯한 서방 언론매체들은 나토가 이러한 '연대표명'이라는 공치사만 했을 뿐 실질적으로는 터키와 뜻을 같이하거나 도와주는 행동에 나서지는 않았다고 지적했다.
나토 사무총장은 기자들에게 "나토의 터키 지지는 무조건적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해 미묘한 입장임을 시사했다.
오히려 막후에선 쿠르드족 무장세력 공격을 자제하고 PKK와의 휴전이 유지도록 노력해 줄 것을 터키 측에 강력 촉구했다고 독일 공영 ARD방송 등은 전했다.
물론 터키는 자신들의 공습 대상은 터키 내의 PKK와 시리아 및 이라크 국경 지역을 넘나드는 그 연루세력 뿐이며, 시리아 내 쿠르드계 무장조직인 인민수비대(YPG)는 포함돼 있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다.
YPG는 미국의 공습 지원을 받으며 IS를 서서히 몰아내며 터키와의 국경지대에서 관할지역을 계속 늘려나고 있다. 터키의 주장은 IS와의 전쟁엔 지장이 없을 것이니 염려말라는 것이다.
하지만 터키는 시리아 정부와 IS 힘이 약화된 공백을 쿠르드계인 YPG가 차지하면서 자국 동남부 국경이 불안해지는 것을 내심 우려해 왔다.
이미 이라크 북부지역엔 쿠르드자치정부가 들어서 있고 그 산악지대를 무대 삼아 PKK가 활동하고 있는 터다.
터키는 이번에 인지르지크 기지를 미 공군의 IS공습에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해주고 시리아와의 국격에 '완충지대'를 만들기로 합의했다.
이는 터키로선 PKK든 YPG든 쿠르드 무장세력의 확대를 막는 것이 매우 중요했음을 보여준 것이다.
◇ 터키의 전략은 '위험한 도박' = 그럼에도 터키의 전략은 IS와의 전선을 분열시키고 중동 분쟁의 양상을 더 복잡하게 만들 '위험한 도박'으로 우려되고 있다.
BBC 방송은 다양한 쿠르드계 정치 및 무장세력 간 이해관계가 다르다고 하지만 이는 방법론 상의 차이일뿐 큰 틀에선 '민족적 대의'에 충실해온 역사가 있다며 터키의 '분할정책'이 작동한다는 보장이 없다고 지적했다.
이라크북부 산악지대를 주무대로 삼는 PKK와 시리아 북부를 지배하는 무장세력인 YPG는 민주통합당(PYD)이라는 시리아 내 쿠르드 정치세력을 고리로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어 왔다.
또 쿠르드계 무장 반군세력들은 이슬람과 지하디스트들이 지배하고 있고 알카에다와 동맹관계인 자바트 알-누스 등도 포함돼 있어 터키와 서방의 계산대로 사태가 전개되지 않을 수 있다고 BBC는 밝혔다.
이라크 정부가 29일 터키의 PKK 공습과 관련 "위험을 고조시키고 이라크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라며 항의하고, 이란도 쿠르드계 무장세력에 대한 회유에 나선 것도 주목할 대목이다.
터키 내에서 IS 측 지하디스트들과 쿠르드 무장세력의 보복 공격도 터키를 혼란에 빠뜨릴 수 있다.
독일은 29일 첩보를 인용, 이스탄불 지하철과 버스 정류장 등에서 테러 공격 가능성을 경고했다고 슈피겔은 전했다.
미국의 암묵적 동의 속에 이뤄지는 터키의 '도박'은 동맹세력들 간의 충돌을 초래하고 공동의 목표인 IS 격퇴를 어렵게 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 BBC 등 유럽 언론매체들의 주된 시각이다.
◇ 나라 없는 약소 민족 쿠르드 또 배신당하나 = 이런 상황에서 IS와의 전쟁 선봉에서 피를 흘려온 YPG, 즉, 쿠르드인들이 결국 미국 등 서방에 배신당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런던 소재 싱크탱크 RUSI의 터키 전문가 애런 스타인은 BBC에 "미국이 터키 대신에 PKK를 선택할 일은 애초부터 없었다"고 주장했다. 쿠르드는 전략적으로 터키를 대신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완충지대' 설치와 인지르지크 공군기지 사용허가 등은 이해관계에 공통점이 많은 미국과 터키가 이미 전략적 계산을 마친 상태임을 보여준다는 설명도 있다.
영국 신문 인디펜던트의 중동전문가 로버트 피스크는 그동안 강대국마다 쿠르드족을 배반해온 역사가 있어 설령 이번에도 배반당해도 그리 놀랍지 않은 일일 것이라고 말했다.
피스크의 말처럼 사실 쿠르드인의 역사는 배반당한 역사라고도 말할 수 있다.
현재 터키, 이라크, 이란, 시리아 등 중동 각국에 흩어져 사는 쿠르드인은 약 3천여만명.
작은 규모의 민족이 아니지만, 역사적으로 한 번도 독립국가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여기저기 치이면서 강대국들의 독립 지원 약속을 믿고 피를 바치기도 했으나 숱하게 배신당했다.
1차대전과 2차대전 전후 재편과정에서 뿐만이 아니다.
1970년대 미국과 이란의 지원을 받아 사담 후세인 치하 이라크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미국이 등을 돌리고 무기 공급을 끊는 바람에 18만2천명이 학살당한 아픈 역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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