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개월 남았다" 다 버리고 떠난 여행…20년을 살았다
췌장암 이겨낸 문학평론가 전규태 산문집 출간
편집부
news@bujadongne.com | 2015-07-28 15:32:36
"3개월 남았다" 다 버리고 떠난 여행…20년을 살았다
췌장암 이겨낸 문학평론가 전규태 산문집 출간
(서울=연합뉴스) 한혜원 기자 = 전규태(82)씨는 문학평론가이면서 시인이다. 한일 비교문화 연구가로도 활동한 그는 현대시인협회 국제교류위원장, 문학평론가협회 부회장, 한국고전연구회 회장 등을 지낸 문학계 원로다.
전씨는 1933년 유복자로 태어났다. 선친은 폐결핵이 있다는 것을 숨기고 결혼한 지 3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충격을 받은 어머니는 전씨를 외할머니에게 맡기고 일본 유학을 떠났다.
전씨는 외로운 유년기를 보냈지만 다행히 성공한 국문학자로 장성했다. 그러나 1997년, 일생에 또 한 번 큰 위기가 다가왔다.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운영한다던 아들 사업이 망하면서 부인이 회사에 부은 8억8천만원이 날아가 파산했다. 부인은 자살을 시도했다가 폐인이 됐고 아들은 지금까지 행방불명이다.
극도의 스트레스를 겪은 한 해가 지나고 1998년, 그는 췌장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수술을 마친 의사는 전씨에게 "남은 기간은 길어야 3개월"이라며, 마지막이 고통스러울 테니 사는 동안은 국외여행을 하다 객사하기를 권유했다.
전씨는 그 길로 여행을 준비했다. 연금을 깨고 세 딸에게 일부를 나눠주고서 나머지를 들고 호주로 갔다. 그때부터 호주에 적을 두고 10년간 세계 일주를 했다.
전씨를 28일 서울 광화문의 음식점에서 만났다. 그가 암 진단을 받고 나선 세계 일주 이야기, 그리고 그의 삶과 죽음에 관한 소회를 적은 산문집 '단테처럼 여행하기'(열림원)를 소개하는 자리다. 의사는 그가 3개월 정도 살 수 있다고 했지만 벌써 17년이 지났고 그는 건강했다.
전씨는 "책에는 제가 '세계 어디를 보고 어떻게 느꼈다' 이런 얘기보다 제 나름의 여행 철학을 썼다"면서 "책의 밑바닥에 흐르는 것은 '자유', 그리고 여행하면서 그린 그림들"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모든 것을 다 놓아버리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부유'하다가 생체의 '조화'를 되찾게 되었다고, 그렇게 죽음을 삶으로 바꿨다고 확신한다"고 책에 썼다.
전씨는 여행을 떠나면서 만나는 고마운 사람들에게 초상화 선물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마비된 손으로 그림을 배웠다.
긴장 완화에도 도움이 됐는지 마비가 서서히 풀렸고, 그림 그리기는 취미를 넘어 업이 됐다. 현재 작가보다 삽화가로 더 활발하게 활동하는 전씨는 산문집 표지 그림과 책 속 그림 20장도 직접 그렸다.
전씨는 "호주에 적을 두고 10년쯤 떠돌다 죽어서는 한국에 묻히고 싶어 몇 년 전 잠시 한국에 돌아왔는데, 그때 호주서 살던 마을에 산불이 났다"며 "오갈 데 없는 상황에서 소설가 김승옥의 소개로 일본 소설가 다사이 오사무 작품을 번역했고 출판사와 인연으로 이번 산문집 집필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전씨는 "이번 산문집은 지난 1년 반 정도에 걸쳐 죽으라고 썼다"면서 "글을 쓰는 게 어려운 것보다, '내가 얼마나 살겠나?' 싶은 마음에 마지막 작품이라는 생각으로 잠을 설치면서 썼다"고 털어놨다.
작가가 소개한 것처럼 산문집은 여행에 대한 이야기보다 매일 죽음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여행길을 걸어간 작가의 소회가 담겼다.
"길 위에서 내가 간절히 만나고 싶었던 것은 다름 아닌 또 하나의 나였다. 또 하나의 나, 또 하나의 인생을 확인하고 싶었다. 사르트르가 말했듯이 '인간은 마음먹기에 따라 스스로를 재창조할 수 있는 존재'라 믿으며 길 위에서 '잃어가는 나'와 '잃어버린 너'를 되찾고 싶었다. 그 강렬한 그리움이 나를 살아남게 했는지도 모르겠다."(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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