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70년> 잊히고 사라진 연해주 애국지사들의 자취

무관심 속에 방치돼 신한촌 독립운동 유적 망실·훼손
최재형 고택 복원 지지부진…이상설 유허비에 오류 여전

편집부

news@bujadongne.com | 2015-07-22 07:00:04

△ 독립 운동가 이상설 선생 유허비 (우수리스크=연합뉴스) 신유리 기자 =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의 수이푼 강변에 있는 독립 운동가 이상설 선생 유허비. 2015.7.22 newglass@yna.co.kr

잊히고 사라진 연해주 애국지사들의 자취

무관심 속에 방치돼 신한촌 독립운동 유적 망실·훼손

최재형 고택 복원 지지부진…이상설 유허비에 오류 여전



(블라디보스토크·우수리스크=연합뉴스) 신유리 기자 = 저 황량한 광야에서 얼마나 많은 독립운동가가 스러져갔을까.

러시아의 동쪽 끝인 연해주.

공항에 도착하니 끝없이 펼쳐진 벌판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갑자기 불어닥치는 찬 바람. 7월인데도 초겨울 같은 냉기가 서렸다. 시베리아의 끝자락에 왔다는 게 실감 났다.

연해주는 이처럼 한반도에서 머나먼 북녘인데도 일제강점기 항일 투쟁이 들불처럼 타오른 곳이다.

지리적으로 두만강 하구와 맞닿아 있고, 역사적으론 1860년대부터 이주해온 고려인들이 한인촌을 이루고 있어 독립운동의 불씨가 움텄다.

홍범도, 안중근, 최재형, 이동휘, 이범윤 등 애국지사는 연해주 한인 동포들과 곳곳에서 무장투쟁을 일으키며 일제의 숨통을 조였다.

그중에서도 블라디보스토크는 '새로운 한인들의 마을', 즉 '신한촌'(新韓村)을 중심으로 구한말부터 1920년대 초까지 민족해방운동의 거점이 됐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연해주의 주도(州都)이자 겨울에도 얼지 않는다는 '부동항'으로 유명한 항구 도시다.

공항에서 차로 한 시간가량 달려 도착한 신한촌. 이역만리 타향에서 조국 독립에 목숨을 바친 선열들의 발자취는 얼마나 남아 있을까.

"블라디보스토크에 한인촌이 있었다는 걸 아는 러시아 사람은 거의 없을 거예요. 독립운동 유적도 마찬가지죠. 이동휘, 최재형 선생 등이 여기서 활동했는데…. 그만큼 중요한 곳으로 알려지지 않아 안타깝죠."

20년 넘게 블라디보스토크에 살면서 역사 전문 가이드이자 최재형장학회 홍보대사로 활동 중인 조미향 씨의 말이다.

실제로 신한촌이 한인들의 거주지였다는 흔적은 러시아어로 쓰인 주소 표지판 하나가 유일했다.

'세울 스카야 2A', 즉 서울 거리 2A번지를 뜻한다.

이 표지판은 현재 러시아인이 사는 집 외벽에 붙어 있어 가까이 접근하기조차 어려웠다.

근처로 차를 돌려 이동휘 선생이 거주했다는 집터를 찾았다. '엘레나'라는 간판을 단 상가만이 남아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 선생인데도 그 자취는 어디에도 없었다. 상가로 장을 보러 나온 러시아인들의 모습에서 신한촌이 이젠 러시아의 평범한 주택가로 변했음을 체감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해 서둘러 발길을 돌렸다.

대동공보사, 해조신문사, 한인학교 등이 밀집해 독립운동의 사령탑 역할을 했던 '개척리'를 찾아나섰다.

100여 년 전 애국지사들이 누볐을 그 거리는 어떤 모습으로 남았을까.

결과는 허탈했다. 상점, 식당 등이 즐비한 번화가로 변한 거리에서는 항일 유적이라는 표지는커녕 원래 건물의 터조차 찾기 힘들었다.

대동공보와 해조신문사는 자주독립 정신과 국권 회복을 부르짖은 대표적 신문으로, 안중근 의사와 황성신문 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의 장지연 선생 등이 몸담았다.

이 거리에서 퍼져 나간 피맺힌 외침으로 조국은 일제에서 해방됐다. 하지만 광복 70년이 된 오늘은 러시아인 쇼핑객의 발길만 북적일 뿐이었다.

연해주는 국외 항일 투쟁의 본거지였는데도 막상 찾아간 현장에서는 이처럼 쓸쓸함만이 감돌았다.

이유가 뭘까.

남한에서는 남북 분단 이후 이념 대결에 휘말려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이 상대적으로 조명을 받지 못했다.

러시아에서는 특히 항일 유적에 대한 학술적 연구조차 한국과 수교한 1990년 이후에야 가능해졌다.

학계에서는 연해주에서 활동한 수많은 애국지사가 여전히 무관심 속에 잊혀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여성 독립운동가인 김 알렉산드라(1885∼1918)가 대표적 사례.

그는 하바롭스크 등지에서 일제에 억압당하는 한인 노동자를 위해 싸우고, 이동휘 선생과 함께 한인사회당을 세우는 등 여성의 몸으로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한인 최초의 공산주의자이기도 한 그는 일제와 손잡은 러시아 백위파에 붙잡혀 33살 나이에 고문 끝에 총살당하는 비극적 최후를 맞는다.

하지만 그를 기릴 만한 흔적은 거의 다 사라지고 없다.

반병률 한국외대 교수는 "김 알렉산드라의 기념패가 하바롭스크의 건물 벽에 새겨져 있었지만 몇 년 전 철거된 것으로 안다"면서 "연해주에서 활동한 독립투사들의 발자취를 재조명하고 그들이 남긴 숭고한 정신을 이어가려는 노력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어렵사리 발굴한 유적이나 기념비의 사후 관리도 허술하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다시 한 시간을 달려 도착한 우수리스크.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로 꼽히는 최재형 선생의 마지막 고택을 찾아갔다. 허름한 1층 건물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곳곳에 보수가 필요해 보였고, 마당에도 잡초가 무성했다.

외벽에 '독립운동가 최재형의 집'이라는 표지판마저 없었다면 러시아 시골의 빈집으로만 보였을 것이다.

연해주의 대부호였던 최재형 선생은 어쩌다 이곳에서 마지막을 보냈을까.

그는 자수성가로 일군 재산을 안중근 의사 등의 무장투쟁을 지원하는 데 쏟아부었고, 수십 개 한인 학교를 세워 민족운동을 고취하는 데 앞장섰다.

하지만 일제가 무고한 한인 수백 명을 참혹하게 학살한 1920년 '4월 참변' 당시 최재형 선생도 이 고택에서 끌려나가 총살당했다.

4월 참변으로 연해주의 항일 전선은 큰 타격을 입어야 했다.

외교부 산하 재외동포재단과 우수리스크의 고려인 동포들은 최재형 선생 고택을 사들여 그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으로 만드는 방안을 추진 중이지만 자금 문제 등으로 진척을 보지 못하고 있다.

고려인민족문화자치회 김 발레리아 부회장은 "우리 고려인들이 최재형 선생의 고택 매입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면서 "이젠 한국 정부가 자금 문제를 조속히 해결해 최재형 선생의 숭고한 뜻을 이어갈 기념관을 세우길 바란다"고 말했다.

마지막 탐방지로 찾아간 곳은 '헤이그 특사' 이상설 선생의 유허비.

우수리스크 수이푼 강변에 있다는 유허비를 찾아 비포장도로를 한참 달렸다.

이상설 선생은 헤이그 사행을 마친 뒤 조국 땅으로 돌아가는 대신 1909년 연해주의 항일 전선에 합류했다. 그는 권업회 등을 이끌며 일제에 맞서 싸우다 1917년 순국했다.

그의 유언은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을 불태워 바다에 날리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것.

유언대로 그의 유해는 화장돼 수이푼 강물에 뿌려졌고, 화장터를 찾지 못한 채 2001년에야 강변 어딘가에 비를 세웠다.

숲길을 가로질러 찾아간 유허비는 무성하게 자란 수풀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었다. 쓸쓸함만이 감돌았다.

비문에도 작은 오류가 있었다. 이상설 선생의 호는 '보재'(溥齋)인데 '보제'로 잘못 적혔고, '한국 독립을 주장하다'는 문구도 당시 상황을 반영하면 '대한 독립을 주장하다'로 쓰는 게 맞을 듯하다.

하지만 유허비는 그저 무심하게 흘러가는 강물을 묵묵히 내려다볼 뿐이었다.

이상설 선생이 눈감는 순간까지 바랐던 조국의 광복이 올해로 꼭 70년이 됐다.

그의 유해는 강물을 따라 흘러 흘러 동해까지 닿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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