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65주년> ⑦"생사만이라도 알고 싶어"…애끊는 이산가족

이산가족 신청자 12만명… 절반 이미 숨지고 대부분 고령자
대면 상봉은커녕 화상통화·서신교환도 끊겨 '막막'

편집부

news@bujadongne.com | 2015-06-22 07:00:23


⑦"생사만이라도 알고 싶어"…애끊는 이산가족

이산가족 신청자 12만명… 절반 이미 숨지고 대부분 고령자

대면 상봉은커녕 화상통화·서신교환도 끊겨 '막막'



(서울=연합뉴스) 김경윤 기자 = "부모님, 아내와 같이 빠져나왔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 했어. 예전에는 잠들면 북녘땅의 가족들이 꿈에라도 종종 나오더니 이제는 영 나오지도 않네."

황해도 해주가 고향인 김인명(90) 할아버지는 지금도 65년 전인 1950년 초겨울 26살의 나이에 아내와 헤어져 쫓기듯 남쪽으로 떠나온 기억이 생생하다.

마을 치안대에서 근무하다 북한 인민군에 쫓겨 마을 뒤 목화밭으로 몸을 숨길 때까지만 하더라도 금방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김 할아버지는 "마을을 휘젓고 다니는 인민군에 발각되기라도 하면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이 뻔했지만 이틀간 생 고구마 세 개만 먹으면서도 고향마을 근처 산을 떠나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하루 이틀로 생각했던 생이별의 시간은 어느덧 65년으로 늘어났다. 20대 청년은 백발의 노인이 됐지만 이제는 두고 온 가족들의 안부는커녕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알 길이 없어졌다.

김 할아버지는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열릴 때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을 가졌지만 야속하게도 번번이 가족을 만날 기회는 오지 않았다.



◇ 이산가족 절반 가까이 숨져…생존자도 대부분 80·90대

대한적십자사에 따르면 김 할아버지처럼 6·25전쟁 때 가족과 헤어지고 지금까지 떨어져 사는 이산가족은 지난달 말 기준으로 남한에만 총 12만9천688명이다.

북한에 남은 가족이 불이익을 당할까 봐 일부러 등록하지 않은 이산가족까지 고려하면 전체 인원수는 훨씬 더 많아질 것으로 추정된다.

이산가족 중 절반가량인 6만2천845명은 이미 숨져 생존자는 6만6천843명에 불과하다.

생존자의 연령대를 살펴보면 80대가 2만8천378명(42.5%)으로 가장 많다. 그 다음으로 70대가 1만8천208명(27.2%), 90세 이상은 8천82명(12.1%)이다.

이 때문에 이산가족 중에서도 북한에 남은 가족이 아직 살아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접은 이가 적지 않다고 한다.

김 할아버지는 "나도 이제 아흔이니 부모님은 이미 다 돌아가셨을 것"이라면서도 "이제는 언제 돌아가셨는지 알고 싶고, 산소 위치라도 가르쳐주면 찾아가고 싶다"며 안타까워했다.

최근 5년간 생존자 통계를 살펴보면 2010년 말 8만2천477명이던 생존자가 2011년에는 7만8천892명, 2012년 7만4천836명, 2013년 7만1천480명에 이어 지난해에는 6만8천264명으로 매년 3천명 가량 줄어들고 있다.

이 추세대로면 내년이면 전체 이산가족 가운데 사망자의 수가 생존자 수를 넘어서게 된다.

이산가족 사망자가 계속 늘어남에 따라 대한적십자사는 생존자들을 상대로 유전정보 보관 사업에 나섰다.

이산가족의 혈액과 머리카락, 구강 상피세포를 채취해 두고 사후에라도 북한에 있는 가족과 혈연관계가 맞는지 확인할 수 있게 하려는 조치다.

대한적십자사에 현재까지 유전정보 보관을 신청한 이산가족은 2만1천914명이다.



◇ 대면상봉은커녕 화상·서신교환도 '올 스톱'

이산가족이 처음으로 만난 것은 분단 40년 만인 1985년 9월 20일 남북 예술단 교류 및 이산가족 상봉 시범 사업이었다.

하지만 사전 생사확인 작업 없이 고향 방문을 목적으로 진행한 사업이라 실제로 이산가족 상봉이 성사된 경우는 절반을 조금 넘겼다.

당시 평양이 고향인 이산가족 50명 가운데 35명, 서울을 방문한 북측 이산가족 50명 중 30명이 가족을 만났다.

이후 이산가족의 신청과 사전 조사를 거쳐 진행된 본격적인 이산가족 상봉은 2000년 8월 15일 제1차 대면상봉 행사를 통해 처음 성사됐다.

이후 2007년까지 매년 많으면 세 차례, 아무리 적어도 연간 한 차례씩은 상봉행사가 열렸지만 한 번에 만날 수 있는 인원은 800∼1천200여명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남북관계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이산가족 상봉은 남북관계 경색으로 2008년에는 한 해를 걸렀고 2009년, 2010년엔 한 차례씩 열린 이후 2014년 2월 20일을 마지막으로 더는 상봉 행사가 열리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19차례에 걸쳐 열린 대면 상봉으로 그리던 가족을 만난 이산가족은 총 3천934가족, 1만8천799명이다.

이 가운데 남측 인원은 1만2천297명으로 전체 이산가족 수인 약 12만명에 비하면 10% 수준으로 턱없이 적다.

직접 만나지는 못해도 화상통화를 하는 화상상봉이 2005년 8월 15일부터 시작됐지만 2007년 11월 14일 제7차 상봉을 끝으로 더는 진척이 없는 상황이다.

이외에도 남측 가족의 모습을 담은 영상편지는 지난해까지 총 8천44편이 제작됐지만 실제로 북녘땅의 가족에게 전달된 것은 20편에 불과하다.

일반 편지의 경우 2001년 3월 남북에서 각각 300명씩 교환했다.

이산가족들이 가장 애타게 바라는 생사 확인은 2001년에 두 차례에 걸쳐 이뤄졌다.

당시 총 2천267명의 북측 이산가족의 생사가 확인됐지만, 여전히 깜깜무소식인 이산가족의 수가 훨씬 많다.

대면 상봉과 화상통화, 서신 교환 등 북쪽의 가족들과 소식을 주고받을 가능성이 가로막힌 상황에서도 이산가족들은 여전히 혹여나 헤어진 가족들과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기다리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

1·4 후퇴 때 부모님만 평양에 두고 형제들과 함께 피란한 김윤호(84) 할아버지는 "두고 온 가족들과 상봉하기만 하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없다"며 "더 바랄 일이 뭐 있겠느냐"고 덤덤히 말했다.

"당시 짧으면 일주일, 길면 보름 정도 후퇴했다가 다시 돌아올 것이니 젊은 사람들만 피하라는 미군의 말을 믿고 고향집에 남은 부모와 헤어져 형제들과 피란길에 올랐어. 하지만 그 이후 다시는 평양 땅을 밟지 못했지. 언제쯤 가 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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