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양서 연행록 기록으로만 전해진 비석 실물 첫 확인
한국학중앙연구원 연행록사전 편찬팀, 사찰 경내서 발견
편집부
news@bujadongne.com | 2015-06-16 10:55:45
△ (선양=연합뉴스) 홍창진 특파원 = 300년 전 청나라로 파견된 조선 연행사들이 연행록에서 기록한 선양 시성쓰(實勝寺) 경내 '사체문비(네 가지 언어로 적힌 비석)'가 한국학중앙연구원 연행록사전 편찬팀에 의해 처음으로 실물로 확인됐다. <사진제공 신춘호 한중연행노정답사연구회 대표> realism@yna.co.kr선양서 연행록 기록으로만 전해진 비석 실물 첫 확인
한국학중앙연구원 연행록사전 편찬팀, 사찰 경내서 발견
(선양=연합뉴스) 홍창진 특파원 = 300년 전 연행사(燕行使·조선후기 청나라 수도 연경으로 파견된 사신)들이 연행록에서 기록한 비석 실물이 중국 선양(瀋陽)에서 처음으로 확인됐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연행록사전 편찬팀(연구책임자 조융희 교수)은 16일 "최근 중국 단둥(丹東)에서 선양에 이르는 연행노정을 답사하면서 선양시내 청나라 황실사원이던 스성쓰(實勝寺) 경내에서 기록으로만 전해져온 '사체문비'(四體文碑) 실물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사체문비는 스성쓰 마당 동·서편에 서 있던 2개의 비석이며 동쪽 비석은 만주어와 한문으로, 서쪽 비석은 몽골어와 산스크리트어로 사찰의 연혁을 설명했기 때문에 '네 가지 글자(四體文)의 비석(碑)'이란 명칭을 갖게 됐다.
1638년 사찰 창건 당시 세워졌고 낙성식에는 병자호란 후 볼모로 선양에 끌려왔던 소현세자가 참석하기도 했다.
1712년 동지사행(겨울철 사신파견)에 참가한 문인·화가 김창업(金昌業)과 1720년 고부사행(왕의 승하를 알리는 사신)에 참여한 학자 이기지(李器之)가 비석의 규모와 기록방식에 깊은 인상을 받고 연행록에 기록을 남겼다.
김창업은 '시성쓰의 뜰 동편에 있는 매우 큰 비석 앞면에 적힌 연혁을 옮겨 적었고 뒷면에 만주어로 기록된 사실과, 서편에 있는 비석은 다 청나라 글로 돼 있어 해독할 수 없었다'고 적었다.
이기지도 '사찰에 몽골 승려와 만주족 승려만 있는데 금전을 많이 요구한다'며 "넓은 마당의 절 연혁이 적힌 비석 두 개는 선양의 다른 사찰에서 본 것과 같이 사체문비였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이 비석은 지금까지 기록으로만 전했을 뿐 한국 학계에 실물로 확인되지는 않았다.
편찬팀은 지난 5~10일 연행노정 답사에서 비석 실물 확인을 시도했지만 현재 절마당에는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돌덩이만 놓여 있다.
한동안 경내를 탐문한 편찬팀은 일반인 출입이 금지된 요사채(승려들의 생활공간) 안 마당에서 비석을 발견했다.
사체문비는 원래의 모습이 아니라 귀두, 비신, 귀부로 쪼개진 채 구석에 방치된 상태였다.
편찬팀은 "청나라 멸망 후 사찰이 대중적 관심과 보호에서 멀어진데다 1960~1970년대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 등에 의해 비석이 파괴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했다.
편찬팀 좌장인 신익철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18세기 초 연행사들이 주목한 비석을 한국 학계가 처음으로 확인한 것은 큰 성과"라며 "연행록을 바탕으로 사체문비를 확인할 수 있어 기록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워 준다"고 말했다.
[ⓒ 부자동네타임즈.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