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안 통치의 '덫'이 됐던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24년 만에 누명벗은 강씨는 암 투병…檢·사법부 유감표명 안해
편집부
news@bujadongne.com | 2015-05-14 11:14:40
△ 강기훈씨 24년만의 무죄 확정
(서울=연합뉴스) 황광모 기자 = 14일 오전 서울 서초동 대법원 앞에서 '강기훈의 쾌유와 명예회복을 위한 시민모임' 회원들과 변호인들이 기자회견을 마친 뒤 현수막을 접고 있다.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리는 유서대필 사건의 강기훈씨는 이날 대법원에서 24년만에 재심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간암으로 투병중인 강씨는 이날 재판과 기자회견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hkmpooh@yna.co.kr
공안 통치의 '덫'이 됐던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24년 만에 누명벗은 강씨는 암 투병…檢·사법부 유감표명 안해
(서울=연합뉴스) 이신영 기자 =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리는 유서대필 사건의 당사자 강기훈씨는 24년 만에 완전히 누명을 벗었다. 이 사건은 이른바 '분신정국' 와중에 발생했다.
노태우 정권 시절이던 1991년 4월26일 명지대 1학년 강경대씨가 시위 도중 숨졌다. 특히 강씨가 경찰의 쇠파이프에 집단구타를 당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사흘 뒤 전남대생 박승희씨가 "살인 정권을 규탄한다"며 분신했고, 이후 공권력의 폭력에 항의하는 대학생과 노동자들이 몸을 내던졌다.
김기설 당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사회부장도 5월 8일 서강대 옥상에서 "노태우 정권 타도"를 외치며 분신했다.
당시 박홍 서강대 총장은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며 김씨의 죽음을 재단했고, 검찰 수사가 시작됐다.
서울지검 강력부는 5월18일 김씨가 남긴 유서가 평소 김씨의 필적과 다르다고 발표했고, 이틀 뒤 김씨의 동료였던 강씨를 유서대필자로 지목했다. 이때부터 강씨에게는 악몽의 날들이 시작됐다.
강씨는 잠도 자지 못한 상황에서 욕설이 난무하는 수사를 받았다고 한다. 결국 자살방조죄로 재판에 넘겨졌다.
유서까지 써주며 분신을 종용했다는 공안당국의 수사결과에 운동권은 도덕성에 치명상을 입었고, 정국은 반전됐다.
사법부도 무죄를 주장하는 강씨의 목소리를 귀담아 듣지 않았다.
1992년 징역 3년 확정판결을 받은 강씨는 1994년 옥살이를 마치고 출소했지만 삶은 평탄하지 않았다.
그런 강씨에게 희망의 끈을 쥐여준 것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의 진실규명 결정이었다.
과거사위는 2007년 김씨의 필적이 담긴 전대협 노트와 낙서의 필적감정 결과 유서대필은 없었다고 결론짓고 사법부에 재심을 권고했다.
강씨는 이를 토대로 2008년 재심을 청구했지만, 검찰과 법원은 여전히 그에게 엄혹했다.
2009년 서울고법이 재심 개시결정을 했지만, 검찰의 항고와 대법원의 심리지연으로 2012년 10월에서야 재심 개시결정이 확정됐다.
재심 과정에서도 검찰은 끝까지 강씨의 유죄를 주장했고, 2014년 서울고법의 무죄 선고 이후에도 상고를 포기하지 않았다.
재심 청구 후 무죄확정까지만 7년이 더 걸렸다.
그러는 사이 2012년 간암판정마저 받은 강씨는 하루하루 힘겨운 삶을 지탱해야 했다.
그러나 검찰은 물론 사법부도 끝까지 '무죄 확정'에 유감을 표시하지 않았다.
2014년 서울고법에서 재심을 진행한 재판부도 유감 표시는 없었고, 이날 대법원도 관례처럼 "검찰의 상고를 기각합니다"는 말 외에는 별다른 의견 표명은 하지 않았다.
강씨는 2014년 서울고법의 재심 무죄 선고 이후 "재판부가 유감을 표시하지 않는 것이 유감"이라며 사법부에 날을 세웠다. 또 검찰을 향해서도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검찰이 어떤 형태로든지 유감의 표시를 해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고 말하기도 했다.
강씨는 이날 대법원 선고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 부자동네타임즈.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