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예멘> '중동 양강' 사우디-이란 대리전 비화하나
편집부
news@bujadongne.com | 2015-04-23 09:30:04
'중동 양강' 사우디-이란 대리전 비화하나
(두바이=연합뉴스) 강훈상 특파원 = 바레인 앞 걸프 해역에 주둔한 미국 핵 항공모함 시어도어 루스벨트호가 동쪽으로 선수를 틀더니 유유히 이란 턱밑 호르무즈 해협을 돌아 20일(현지시간) 예멘 아덴 앞바다에 도착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호가 아덴만으로 급파된 이유는 이란이 예멘 시아파 반군 후티에 해상으로 무기를 지원하지 못하도록 가로막기 위해서다.
이란의 예멘 진출을 막으려는 사우디아라비아의 공습에 이은 미 항모의 가담으로 표면상으론 이란과 반(反) 이란 세력이 금세라도 무력충돌을 할 것 같은 험한 분위기가 조성됐다.
시어도어 루스벨트호가 지나친 호르무즈 해협은 가장 좁은 곳의 폭이 40㎞밖에 되지 않는 걸프 해역의 길목으로 이란 해군이 24시간 감시하고 있다.
이란이 미 핵항모의 움직임을 분명히 감지했을 것이라는 뜻이다. 게다가 이란군은 2월 말 대규모 군사 훈련에서 미 항모 모형을 고속정으로 폭파하는 모습을 공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실제로 미 항모가 출현했는데도 이란 정부는 침묵했다.
이란은 오히려 후티와 연관성을 부인하면서 국제사회에 예멘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며 대화를 촉구했다.
이란의 예멘 전략은 외교적 수사에 그치지 않았다. 파키스탄이 사우디에 동조해 지상군을 예멘에 파병하려고 하자 황급히 외무장관을 보내 천연가스 제공을 앞세워 이를 무마했다.
산간이 많은 파키스탄은 지형이 예멘과 비슷해 이집트나 사우디와 달리 지상군이 예멘에서 가장 강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됐으나 파키스탄은 사우디의 기대를 저버리고 동맹군에서 빠졌다.
지난달 스웨덴과 사우디가 여성 인권 문제로 충돌하자 이란은 기다렸다는 듯 마르지에 아프캄 외무부 대변인을 1979년 이슬람혁명 이후 첫 여성 대사로 임명한다고 발표했다. 아프캄 대변인의 부임지는 아직 결정되지도 않았다.
최근 보이는 이같은 이란의 의문스러운 행보를 해석하는 틀은 핵협상이다.
이란 중도파 정부는 성사가 눈앞에 다가온 핵협상을 타결하려는 의지가 강하다. 핵협상 합의로 경제·금융 제재가 풀리지 않으면 이란 경제는 회생하기 어려운 지경이 되는 탓이다.
세계 4위의 원유 매장량과 2위의 천연가스를 보유하고도 경제가 추락하는 '흑자부도'를 맞을 수도 있다.
사우디의 전격 공습에도 이란이 예멘에 군사 개입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핵협상과 연결지을 수 있다.
이란이 핵협상 타결 뒤 국제사회에 복귀하기 위해선 '믿을 만한 교역 상대국'이라는 이미지 개선이 필요하다. 사우디의 무력 개입에도 대화를 주장하고 여성문제에서 사우디와 차별화하는 모습을 과시하는 것은 이런 배경에서다.
자국의 반군 지원을 막기 위해 목전에 움직이는 미 핵항모를 묵인한 것도, 그렇지 않아도 미국에 불만이 높아진 사우디에 '여전히 이란을 경계한다'는 메시지를 보내 달랠 수 있도록 미국에 여지를 준 것으로 보인다.
사우디는 핵협상에 이스라엘만큼이나 부정적이다.
이란이 만약 예멘 사태에 군사 개입해 반군을 도와 사우디와 일전을 벌이는 순간 핵협상은 무산될 게 확실하다. 반대로 예멘 사태가 협상을 통해 해결되면 이란의 존재감이 부각되면서 핵협상에서도 지렛대로 쓸 수 있다.
게다가 이란으로선 시리아와, '이슬람국가'(IS) 사태로 이라크에 벌여놓은 전선이 예멘까지 확전되면 전비 지출로 재정 부담이 커진다.
사우디 역시 이란과 전면전을 벌여봐야 이득보다 손해가 더 크다.
군사력에서도 이란에 뒤진다는 게 객관적인 평가이기도 하고, 이란이 예멘에 적극 개입하지 않은 상황에서 전쟁을 유도하는 것도 명분이 없다.
2월 새로 즉위한 살만 국왕의 전격적인 예멘 공습은 시아파 세력으로부터 단호하게 걸프지역을 방어하겠다는 본보기로 삼는 목적이 크고, 2007년 국경지대에서 반군 후티에 대패했던 데 대한 보복 성격으로도 볼 수 있다.
사우디 남부 국경지대에서 종종 문제를 일으키는 무장 세력 후티를 단단히 옭아매는 기회로 보는 것이다.
이란이 예멘 사태를 핵협상의 카드로 사용할 것이라는 의도가 분명해진 만큼 사우디는 이를 가장 빨리 끝내려 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후티의 급속한 세력확장엔 2012년 민주화 시위로 하야한 독재자 알리 압둘라 살레의 협력이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사우디는 살레의 편에 선 예멘 정부군을 회유해 등을 돌리도록 하는 한편, 금융 제재로 살레의 자금줄을 묶어 고사하는 방법을 구사중이다.
살레의 후티 지원을 막은 뒤 예멘 정부를 재건, 사우디 등 걸프지역 수니파 정부의 막강한 경제력으로 예멘에 대규모 개발 사업을 벌여 이란의 영향력을 차단하는 시나리오가 유력하다는 게 의견이 많다.
리야드 야신 예멘 외무장관이 지난달 말 열린 아랍연맹 회의에서 "예멘 대통령이 아랍권 정상들과 예멘을 원조하는 '먀살 플랜'을 논의했다"고 밝힌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예멘 사태는 수니파 종주국 사우디와 시아파 맹주인 이란이 적절한 긴장관계로 중동내 대국으로서 영향력을 유지하는 적대적 공생 관계를 엿볼 수 있는 사례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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