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그리스> ② 미소짓는 러시아…흔들리는 EU
편집부
news@bujadongne.com | 2015-04-14 07:00:12
△ 그리스의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왼쪽)와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연합뉴스 자료사진)
② 미소짓는 러시아…흔들리는 EU
(서울=연합뉴스) 김성진 기자 = 군사강국 러시아를 상대로 한 28개 유럽연합(EU) 회원국들의 '합종'(合縱)이 그리스 등을 상대로 한 러시아의 '연횡'(連橫)책에 크게 흔들리고 있다.
합종연횡은 중국 전국시대 당시 최강국인 진(秦)나라에 대해 연(燕), 제(齊), 초(楚) 등 6개국이 맞선 가운데 6국의 종적 연합을 통한 공수동맹 대(對) 진나라와 개별국가간 횡적 동맹이 경합한 외교 전술을 말한다.
합종연횡을 현재의 유럽 상황에 문자 그대로 대입하기는 어려워도 지난해 3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병합과 잇따른 우크라이나 동부 반군 지원 이후 EU와 맞선 형국은 대체로 엇비슷하다.
러시아의 공세를 2차대전 이후 확립된 주권국가 영토질서를 훼손한 중대한 도전으로 간주한 EU는 군사적으로 미국 주도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를 통한 세력 균형을 추구하면서 금융 제재를 가했고, 러시아는 전투기 등을 동원한 무력시위를 벌이면서 EU 농산물 수입 금지 등의 맞수를 뒀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가 수년째 계속되는 재정위기로 EU 등의 구제금융을 받는 대신 엄격한 긴축정책과 구조조정 요구에 직면하면서 국내 여론 악화로 EU와의 연계 고리가 그만큼 약해지자 그 틈을 러시아가 파고든 것이다.
그러잖아도 동방 정교회라는 공통의 종교문화적 배경과 근대 그리스 독립전쟁에 대한 제정 러시아의 지원 등 역사적 연원이 비교적 가까운 양국은 공교롭게도 EU로부터 공통의 경제적 압박을 받으면서 더 밀착됐다.
그 단적인 예가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의 지난 8∼9일 러시아 모스크바 방문이었다.
당시 그리스는 국제통화기금(IMF)에 4억9천500만 달러(약5천400억 원)에 달하는 차관을 가까스로 상환했으나 첩첩산중인 향후 빚 상환 일정 때문에 시장의 불안을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치프라스 총리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화기애애한 회동을 통해 EU에 보란 듯이 우회적 압박을 가했다.
러시아도 저유가와 서구의 경제제재로 제 코가 석자인 처지라 비록 그리스에 대한 명시적 금융지원을 약속하지는 않았으나 가스 지원책과 함께 향후 그리스산 농산물 수입 재개에 대한 전향적 입지를 마련해줬다. 지중해성 기후인 그리스의 대러 수출품 가운데 40% 이상이 과일 등 농산품으로 그리스는 EU 블록에 대한 러시아의 금수조치로 특히 타격을 받았었다.
올해 마이너스 3% 경제성장이 예상되는 러시아가 그리스를 재정적으로까지 진짜 도울지는 러시아가 그리스 단기국채(T-bill)를 사주는지를 보고 알 수 있다. 그리스는 14일 14억 유로, 17일 10억 유로의 채무를 각각 만기 연장해야 하는 상황이며, 앞서 중국은 그리스에 대한 상징적 지원 차원에서 1억 유로의 단기국채를 매입해줬다.
치프라스 총리는 러시아 방문 전 기자회견에서 'EU의 대러 제재라는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면서 노골적으로 러시아를 역성들었다. 그는 이어 모스크바에서도 '그리스는 자체의 지정학적 역할을 활용할 권리를 지닌 주권국가'라면서 불특정 적에 대한 러시아와의 공동의 투쟁에 관해 언급했다.
이는 다분히 EU를 겨냥한 것으로, 푸틴 대통령도 치프라스 총리의 방러에 관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때에 이뤄졌다"고 화답했다.
EU 회원국들은 오는 6월 대러시아 제재에 대한 재검토에 들어가는데 28개국이 만장일치를 봐야 제재를 연장할 수 있다.
러시아는 그리스와 비슷하게 경제난을 겪은 키프로스에 대해서도 경제지원을 유인책으로 '올여름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푸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는 반응을 끌어냈다.
푸틴 대통령은 또 일찌감치 지난 2월 EU 내에서 '퇴행적 권위주의 정권'인 헝가리를 방문해 양국간 경제적 합의를 봤으며 체코도 러시아에 기웃거리는 모양새다.
이 때문에 도날드 투스크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은 최근 러시아에 맞서 "유럽의 단결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큰 도전"이라고 토로할 정도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이와 관련, "푸틴 대통령이 25년 전 구소련이 스스로 붕괴하는 모습을 참담하게 지켜봤던 때와 달리 이번에는 단지 돈 때문에 자기보다 부유한 적들이 분열되는 모습을 바라보며 틀림없이 미소를 짓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리스를 통한 러시아판 연횡책이 승리할 것으로 보기는 아직 시기상조다.
이승근(계명대 정치외교학 교수) 한국유럽학회 회장은 "역사적으로 볼 때 그리스의 독립전쟁 때 발칸반도로 남진정책을 추진하던 러시아가 돕긴 했지만 결국 결정적 도움은 서방에서 왔다"면서 "그리스에 대한 서방 문명의 영향력이 러시아의 범슬라브주의보다 더 크다는 점에서 볼 때 그리스가 EU에서 러시아로 전략적 전환을 했다기보다는 그 양자 사이에서 실익을 취하는데 그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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