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야권 주자 넴초프 피살 한달…회고록 출간
넴초프 인간성 다룬 '넴초프: 공보비서관의 수기'
편집부
news@bujadongne.com | 2015-03-31 10:58:34
러시아 야권 주자 넴초프 피살 한달…회고록 출간
넴초프 인간성 다룬 '넴초프: 공보비서관의 수기'
(서울=연합뉴스) 지일우 기자= 러시아의 유력 야권지도자인 보리스 예피모비치 넴초프(55)가 크렘린궁 인근에서 괴한의 총탄에 쓰러진 지 한 달이 조금 지났다. 그러나 살해범의 신원과 살해 배경, 그리고 배후 등은 사실상 여전히 미궁에 빠져 있다.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 시절 제1 부총리를 지내기도 했던 '개혁파' 넴초프는 지난 2월 27일 금요일 밤 11시 40분께, 크렘린에서 불과 200m 가량 떨어진 붉은광장 부근 모스크보레츠키 다리에서 여자 친구인 우크라이나 출신 모델 안나 두리츠카야(23)와 산책을 하다 4발의 총탄을 맞아 그 자리에서 숨졌다. 사건은 치밀하게 기획됐고 신속하게 실행됐다. 함께 있던 두리츠카야는 물론 당시 부근에서 제설작업을 하던 제설차량 운전자조차 범인을 보지 못했다고 진술했을 정도다.
야권을 중심으로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기도 했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즉각 모든 사법 당국 수장들에게 철저한 책임 수사를 지시했고, 당국은 사건 발생 10여 일 만인 3월 10일 러시아연방 내 체첸공화국의 내무군 출신인 자우르 다다예프와 베슬란 샤바노프 등이 기획한 살인이라고 발표했다.
독실한 이슬람교도인 다다예프는 넴초프가 러시아에 거주하는 무슬림과 예언자 무함마드에 대해 비판하는 것을 참을 수 없어 범행했다고 자백했다고 당국은 밝혔다. 특히 지난 1월 발생한 프랑스 파리 샤를리 에브도 출판사 테러 사건 이후 넴초프를 비롯한 러시아 사회활동가들이 잡지사와 테러 피해자들을 옹호하는 발언을 하는데 분노를 느꼈다고 했다.
그러나 이 자백 발표는 다음 날인 11일 곧바로 뒤집혔다. 다다예프 본인이 살해 위협 때문에 허위 자백했다고 진술을 번복한데다 야권 역시 넴초프가 살해 동기로 지목된 이슬람에 대한 비난 발언을 거의 하지 않았다며 반박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야권은 수사 당국이 2004년 포브스 모스크바 지국 기자 폴 흘레브니코프, 2006년 노바야 가제타 여기자 안나 폴리트콥스카야 피살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체첸 출신들을 범인으로 몰아 서둘러 수사를 종결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분리주의 이슬람 반군 활동으로 지금도 정세가 불안정한 체첸 지역을 사건의 배후로 몰아 진상 규명을 어렵게 함으로써 크렘린과 연계된 실제 배후를 가리고 도마뱀 꼬리 자르기 식으로 서둘러 수사를 마무리하려 한다는 비판이다.
넴초프의 딸 잔나(30) 역시 영국 B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푸틴의 최대 비판자였고 야권의 가장 강력한 지도자였다"며 정치적 의미에서 넴초프 피살의 책임은 푸틴 대통령에게 있다고 주장했고, 유럽의회는 12일 넴초프 피살 사건을 '러시아 현대사에서 가장 심각한 정치적 살인'이라고 규정하고 이 사건에 대한 국제적인 조사를 촉구했다.
러시아 당국은 이런 비판과 주장들에 대해 헛소리라고 일축하고 있지만 의혹은 여전히 남았다.
이런 상황에서 넴초프를 기리는 회고록이 러시아에서 출판돼 눈길을 끌고 있다고 한다.
넴초프의 보좌관 출신인 릴리야 두보바야가 쓴 '넴초프 : 공보비서관의 수기'가 그 책이다. 오래전 기획된 책으로, 기획 당시에는 '두마(러시아 하원)에서 생긴 사소한 이야기들'이란 제목이 붙었지만 넴초프가 살해된 후 바뀌었다고 한다. 전부터 기획된 책이어서 피살 사건에 초점을 맞춘 게 아니라 넴초프가 어떤 '친구'(동료)인지 보여주는 생생한 전기라고 한다.
책에는 넴초프가 38세 때인 1997년 3월 니제고로드스크주 주지사에서 제1 부총리로 임명된 직후 자신의 정적이자 지독한 독설가가 주지사를 맡고 있던 울랴노프스크를 방문했던 일화가 소개돼 있다.
제1 부총리로 전격 발탁돼 전 러시아가 깜짝 놀란 정치적 풍운아로서의 지위를 이용해 자신을 얕보던 골수 공산주의자이자 오만불손한 유리 고랴체프 울랴노프스크 주지사를 찍어누를 것이란 세간의 예상을 깨고 술이 만취되도록 접대함으로써 굉장히 기분 좋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책에는 또 예브게니 프리마코프 당시 총리, 아나톨리 추바이스 당시 부총리, 그리고리 야블린스키 야블로코당 총재, 그리고 영국 망명 중 암살된 억만장자 보리스 베레조프스키 등등 당시를 풍미했던 러시아의 거물 정치인들과의 일화가 담겨 있다고 한다.
◇보리스 넴초프
1959년 10월 9일 러시아 남부 휴양도시인 소치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러시아 중부 니제고로드스크주에서 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동안 물리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했으며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발생한 1986년에는 새 원전 건설에 반대하는 환경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1990년 러시아연방공화국 최고회의 대의원 선거에 출마해 공산당 후보들을 제치고 당선되면서 정계에 본격 진출했다. 농업개혁과 무역자유화 등을 위한 입법 활동을 주도했던 그는 당시 최고회의 의장이던 옐친의 눈에 띄었으며 이후 대통령이 된 옐친에 대한 보수 강경파의 공격을 저지하는 데 앞장서며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그 덕에 니제고로드스크주지사(1991~97년), 연료·에너지부 장관(1997년), 제1 부총리(1997~1998년) 등 요직을 거치며 승승장구했다. 광범위한 대중적 인기를 바탕으로 한때 옐친의 후계자로도 점쳐졌지만 1998년 아시아 금융위기 여파에 따른 러시아의 채무지급유예(모라토리엄) 선언으로 옐친 정권이 흔들리면서 정치적 인기도 추락했다.
1999년 자유주의 성향의 다른 정치인들과 함께 우파연합 당을 창당해 하원에 복귀하면서 정치적 재기를 노렸지만 같은 당 소속의 일부 정치인이 2000년 집권한 푸틴 정권 지지세력으로 돌아서면서 야당 성향의 유권자들이 등을 돌렸고 우파연합은 결국 2003년 총선에서 대패했다.
이후 푸틴에 반대하는 여러 야권단체와 정당 등을 만들어 이끌면서 재야 반정부 지도자로 활동해왔다. 2008년에는 다른 야권 지도자들과 함께 '솔리다르노스티(연대)'를 창설해 이끌면서 푸틴 정권의 권위주의와 부패, 경제 실책 등을 신랄하게 비판해왔다. 러시아의 대표적인 친우크라이나 인사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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