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흑인참정권 운동 '셀마행진' 50주년…오바마 "아직 안끝나"(종합)
오바마 8년 만에 처음으로 셀마 찾아…"인종 차별 여전히 존재"
민주당 대거 참석 속 공화 지도부 불참…흑백화합 의미 반감
편집부
news@bujadongne.com | 2015-03-08 08:07:01
미 흑인참정권 운동 '셀마행진' 50주년…오바마 "아직 안끝나"(종합)
오바마 8년 만에 처음으로 셀마 찾아…"인종 차별 여전히 존재"
민주당 대거 참석 속 공화 지도부 불참…흑백화합 의미 반감
(댈러스=연합뉴스) 장현구 특파원 = 미국 흑인 참정권 운동의 상징인 '셀마 행진'의 5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미국 앨라배마 주 셀마의 에드먼드 페터스 다리에서 7일(현지시간) 열렸다.
미국 역사상 첫 흑인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부인 미셸 오바마 여사와 두 딸을 대동하고 50주년 행사에 참석했다.
오바마 대통령의 전임자인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도 로라 부시 여사와 함께 연설 단상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지난 2007년 대통령 선거 민주당 후보 경선 때 경쟁자인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과 함께 셀마에 온 이래 재임 중 처음이자 8년 만에 다시 방문한 오바마 대통령은 40분간 이어진 연설에서 당시 셀마 행진에 참가한 이들의 이름을 일일이 호명한 뒤 "정당한 미국을 만들려는 이들의 노력이 승리를 거뒀고, 이 사건이 미국의 운명을 결정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특히 "지난 50년간 상황이 많이 달라졌지만, 미주리 주 퍼거슨 사건에서 보듯 인종 차별은 여전히 존재한다"면서 "셀마의 행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또 경찰·사법 시스템은 모든 사람을 위해 적용돼야 한다며 인종 차별적인 제도의 개선을 촉구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연설 후 흰색 와이셔츠 차림으로 미셸 여사, 두 딸과 손을 잡고 마틴 루서 킹(1929∼1968) 목사 등 흑인 인권 지도자들이 50년 전 그랬던 것처럼 인파의 선두에서 에드먼드 페터스 다리를 걸었다.
지난 1월 백악관에서 셀마 행진의 참상을 다룬 영화 '셀마'의 상영회를 열기도 한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 행사장으로 이동하는 전용기 에어포스 원에서 셀마-몽고메리 행진 참가자에게 의회 황금훈장을 수여하는 법안에 서명했다고 AP 통신이 보도했다.
의회 황금훈장은 미국 의회가 국내외 민간인에게 주는 최고의 상이다.
이날 셀마 행진 50주년 행사에는 당시 경찰의 폭력에 크게 다친 앨라배마 주 출신 존 루이스(조지아·민주) 하원의원과 낸시 펠로시(캘리포니아) 하원 민주당 원내대표를 비롯한 미국 상·하원 의원 100명과 전국에서 몰려든 수 천명의 인파가 참석, 비극을 딛고 인권 승리를 일궈낸 역사의 현장을 지켰다.
다만, 민주당 소속 정치인들이 대거 참석한 데 반해 공화당을 대표하는 존 베이너(오하이오) 하원의장과 미치 매코널(켄터키) 상원 원내대표 등 실세 두 명은 모두 불참해 흑백 화합의 의미는 반감됐다. 공화당 지도부에선 유일하게 케빈 매카시(캘리포니아) 하원 원내대표가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베이너 의장은 대신 성명에서 "셀마-몽고메리 행진 50년이 지난 오늘, 미국 하원은 모든 미국민을 위해 자유의 축복을 쟁취하고자 목숨을 걸고 발걸음을 내디딘 용감한 민중을 영광으로 여긴다"고 밝혔다.
미국 뉴욕의 브루클린 다리에서도 셀마 행진 50주년을 기념하는 도보행진이 벌어졌다.
셀마는 흑인 인권 운동의 대부 킹 목사가 1965년 흑인의 참정권 획득을 위해 셀마에서 앨라배마 주의 행정수도인 몽고메리까지 87㎞를 평화롭게 걸어간 '셀마-몽고메리' 행진의 출발점이다.
킹 목사와 행진 참가자 600명은 그해 3월 7일 셀마를 벗어나고자 에드먼드 페터스 다리 위에 도달했으나 앨라배마 주 경찰은 이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해 무수한 부상자를 낳았다.
당시 일요일에 벌어진 유혈 사태라는 뜻에서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불린다.
이틀 후인 3월 9일, 백인 우월주의 단체가 경찰의 제지를 뚫고 2차 행진을 시도하던 인권운동가 제임스 리브를 때려죽인 참극까지 겹치면서 셀마-몽고메리 행진은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미 전역에서 앨라배마 주와 연방 정부에 시민 불복종 운동을 펼쳐야 한다는 분노의 목소리가 분출했고 흑인의 투표권을 보장하고 행진 참가자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요구도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린든 B 존슨 당시 대통령은 앨라배마 주의 반대에도 미 육군 2천 명을 파견해 행진 일행을 호위했고, 킹 목사는 3월 21일 세 번째 행진을 시작해 전국에서 몰려든 2만5천 명의 지지자와 함께 3월 25일 몽고메리의 앨라배마 주 의사당에 입성해 목표를 달성했다.
존슨 대통령은 결국 그해 8월 6일 흑인의 참정권을 인정하는 역사적인 투표권법에 서명했다.
이후 역설적으로 남북전쟁 당시 노예제 존치를 주장한 남부연합군의 장군 출신인 에드먼드 윈스턴 페터스의 이름을 딴 에드먼드 페터스 다리는 흑인 자유의 상징이 됐지만, 셀마의 실상은 50년이 지나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갈수록 벌어지는 미국 사회의 흑백 경제 격차와 여전한 흑백 차별 양상은 셀마에 고스란히 집약됐다.
미국 언론에 따르면, 셀마의 공립학교는 대부분 흑인 학생들로 채워진 데 반해 백인 학생 대부분은 사립학교에 다닌다.
또 흑인들이 해마다 셀마 행진을 기념하지만, 백인들은 1865년 '셀마의 전투'를 기억하며 남부 백인의 결속을 다진다.
셀마는 남북전쟁 최후 승패를 가른 전장으로, 노예제 폐지를 내건 북군은 이곳에서 남부연합군의 숨통을 완전히 끊었다. 북군에 패한 남부연합군의 후손들은 당시 '셀마의 전투'를 곱씹으며 흑인에 대한 증오와 패배의 한(恨)을 잊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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